중국 전족 여인의 발 보신 적 있으세요?
옛날 중국에는 어렸을 때 부터 발을 꽁꽁 묶어서 성장을 더디게 만들어 작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걸 전족이라 하죠.. 발이 작을 수록 미인이었다는^^;
신발 신으셨을 땐 몰랐는데, 맨발을 보니...헉...!!! 발가락이 아래로 숨어 버렸군요...ㅠ0ㅜ
중국 전족 여인인 할머니 발을 보세요~
발이 작으면서 뽀쪽한거 같지요~~
벗어서 보여 줄려고 하네요~
헉~~완전 삼각형?????
???? 세상에나~~발가락이~~~
엄지 빼고 나머지 발가락을 접어 버렸어요~~~
잘 걸을수 있을까!!!
발크기가 아주 작아요~~~
전족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 봤어요~
전족 [纏足]
중국에서 여자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하여 헝겊으로 묶던 풍습.
묶은 발을 가리킨다. 3∼6세에 가로 10cm, 세로 2∼2.5m의 헝겊을 발에 동여매고 엄지발가락 이외의 발가락을 발바닥 방향으로 접어넣듯 묶어 조그만 신에 고정시킨다. 발뒤꿈치에서 발끝까지 약 10cm가 이상적이라고 하며, 모양에 따라 춘순(春笋), 금련(金蓮)이라고도 한다. 음력 8월 24일(小脚姑娘의 탄생일)에 시작하는데 지방에 따라 다르다.
발은 자라지 못하고 고통도 심하여 바로서기·걷기 등이 모두 불안정하며, 발끝으로 서서 걷는 모양이 되고, 자세도 허리 부분이 튀어나와 팔자걸음을 걷는다. 전족의 풍습이 생긴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당나라 때 서방(西方) 오랑캐 여인의 발끝으로 추는 춤이 유행했는데 이것이 중국 전체에 내재화된 것이라고도 한다.
송말(宋末) 장방기(張邦基)의 저서 《묵장만록(墨莊漫錄)》에 전족은 근세에 생겼다고 하지만, 5대(五代)나 북송 무렵에 이미 있었던 것 같다. 주로 허베이[華北]의 한민족(漢民族)의 풍습으로, 특히 산시[山西] 지방의 다퉁[大同] 부근에서 가장 성행했는데, 남쪽 지방에서는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었으나 만주기인(滿洲旗人)도 도조(刀條)라는 일종의 전족을 하였다.
명대(明代)에 특히 성행했으며, 청대에는 만주인에게도 유행할 조짐이 보여 1664년 금지령을 내렸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후 태평천국(太平天國)에서도 금지하였고, 1894년에는 서태후(西太后)가 금지령을 내려 쇠퇴하였으나 '소각(小脚:전족을 한 발)'에 비해 '대각(大脚:전족을 하지 않은 발)'은 천시되었다. 민국(民國)시대에는 여성운동에 의해 전족 해방이 제창되어 현재는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전족의 기원
전족의 관습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전설에는 은왕조의 멸망을 초래한 폭군 주왕의 애첩 달기에서 시작되었다고한다. 달기는 원래여우가 둔갑한 사람이라 발만은 여우발 그대로라 발을 감추기 위해 비단으로 샀는데 궁녀들이 이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전족은 당말 오대 무렵에 본격적으로 출연했는데 무희들이 예술적 효과를 위해 발을 묶은 것을 보고 궁중의 여인과 상류층 여인들이 흉내내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송대에 유행하다가 원대에는 일반 서민들에게도 유행하는데 일설에는 오랑캐와 구별하기 위해서라고도 한다.
남성의 전족
인위적으로 발을 작게 만드는 전족은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피가나고 살갖이 벗겨지고 고름이 생기기도하며 밤에 잠을 잘수도, 음식을 넘길수도 없어 여러가지 병이 생기기도 했다고한다. 이처럼 잔인한 전족은 남존여비 사상에서 여성을 남성의 예속하에 두고 집안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었다. 기형적으로 어린아이처럼작고 어그러진 발로는 거동이 불편하여 외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외출시 가마를 이용하거나 지팡이를 써야했다. 전족이 성행했던 것은 작고 섬세한 것이 아름답다는 심미관에서라고 한다. 여성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남성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던 시대에 여성은 남성의 심미관에 맞출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심미안은 점차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하여 남성의 성적 자극물이 되었다. 전족을 하고 뒤뚱거리는 모습에서 성적 자극을 얻거나 전족용 신발인 궁혜를 술잔으로 삼아 음주를 즐기기도 하였다. 전족을 하여 불편한 보행으로 엉덩이근육이 발달하여 성행위시 성감을 증폭시킨다고도 생각하였다. 전문적인 전족 감상가도 출연하여 등급을 정하고 미인대회처럼 품평회를 갖기도 하였다.
권문세족의 전족
중국미인의 대명사인 당대 양귀비의 발은 3촌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전족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안정된 농경사회의 타성이 작고 섬세하고 유약한 것을 숭상하는 문화를 발전시키고 여성에 대해서도 섬세하고 병약한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현상을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전족의 기원에서도 말했듯이 전족의 시작은 궁중의 여인들과 상류층의 여인들이었다. 일반의 서민에게도 나중에 전족이 유행했다고는 하지만 전족은 굉장한 통증과 더블어 거동의 불편함을 수발한다. 일이 많은 서민층의 여성이 거동이 불편하면 곤란하다. 그러므로 전족은 어느정도 권세가 있는 집안이나 부자가문의 여성들에게 볼 수 있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가사를 하기에 불편함이 많았기때문에 시중들 여자가 있어야 할수있을 정도였다.
전족과 여성생활
전족을 하게되면 그 순간부터 여성은 활동력이나 노동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또 전족을 한 발은 여하한 경우라도 남성에게 드러내 보이면 안되기 때문에 긴치마로 감추어야했다. 보행자체도 힘들어진다. 이로써 여성은 생산이나 노동으로 부터 소외되어 주체적인 인격이 아닌 관상물 내지 애완물로 격하되어 버린다. 활동공간도 거동이 불편하니 규방으로 제한 되었다.
한편으로 전족은 신분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전족은 그만큼 당사자가 생산노동으로 부터 자유로울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때문이다. 용모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천적으로 주어지지만 전족만큼은 본인의 인내력과 정숙도 그리고 가정교육의 정도를 반영해 주는 것이라 여겨졌다. 작고 예쁜 전족을 지니고 있다면 본인의 순종적인 성향과 엄한 가정내 훈육을 보증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얼굴보다 전족이 잘된 여성을 미인으로 인식하고 혼인시에는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여성의 발 모양 및 크기만은 매파를 통해 통지해주어야만 했다.
배우와전족
전족이 보편적으로 처음 나온 것으로 알려진 것은 오대에 유명한 풍류가이자 문학가 이기도 했던 남당의 황제 후주 이욱의 조정에서 였다. (960년대) 후주는 6척 높이의 금연(金蓮)을 만들어 온갖 보화로 장식한 후 후궁인 요랑에게 비단으로 발을 졸라매고 그안에서 춤을 추게했다. 이때의 풍경이 인상적이어서 당시의 후궁과 무희들이 다투어 이를 모방하여 전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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