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桓檀古記)
1. 「환단고기」란 어떤 책인가?
○ 「환단고기」의 내용
환단고기는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의 4종 사서를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다.
삼성기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을
각각 상하권으로 나누어 합친 것으로, 한인 .한웅시대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시발인 환국시대의 환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하권엔 신시역기가 덧붙여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에 살았던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이 전한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고열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말의 학자인 범장이 전한 책으로, 국사책에서의 고구려
건국 연대는 B.C. 37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이보다 120년 내지는 180년이 앞선 것으로, 몇 가지 기록상의 공통점
등으로 보아 이 북부여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권. 하권. 가섭원 부여기로 구성되는데, 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이다.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 떼의 학자인 이맥이 전한 책으로,
이 한단고기의 압권을 이루는 부분이니, 한국(桓國).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여기엔 신오제본기.한국본기.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본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삼한 관경본기엔 마한세기 상.하와 번한세기 상.하가 담겨있다.
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실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근거로 한다면, 우리 민족의 시작은 고조선부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약 일 만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토는 한반도가 아닌 아시아 대륙 전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보다 알기 쉽게 각 시대를 나열해보자. 환국시대 - 신시 배달국 시대 - 단군조선 -
북부여 - 고구려, 대진국 - 고려라 할 수 있겠다.
이들 시대의 특징과 각 시대를 시작하였던 대표적인 이들
곧, 환인, 환웅, 단군들의 대해서 살펴보겠다.
환국시대의 환국은 천산 동방으로 '동서가 2만리, 남북이 5만리'의
방대한 문명의 대국으로 파내류국이라고도 하였다.
환국을 통치한 분은 안파견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만인이 아버지'란 뜻의 안파견 환인은 초대 환인으로서 환국을 다스렸다.
여기서 환인이란 통치자와 제사장의 관직명이다.
당시 환국은 12환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안파견 환인은 자신의 형제 9인으로 하여금
각 환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를 통칭하여 '광명의 제국'이라 불렀다.
환국시대의 지도를 상상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다음은 배달국 시대이다. 환국의 정신을 계승한 분은 후기 환국 말경에 당시
'자식들의 마을 (서자부)'의 수장이었던 환웅으로, 환웅은 야만 생활을 하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에 환인께서 중국의 감숙성에 있는
삼위산과 동방의 태백산을 살려보고 태백산으로 가고 싶다는 환웅의 뜻을 허락하여
태백산으로 파견하였다. 이 때 환인천제께서는 제세 핵랑군이라 불린 문명 개척단
3천명과 천부인 3개를 주고 개천입교,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만세 자손의 흥법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다. 환웅께서는 이를 배달국을 여는 개국의 창시 이념으로 하였다.
당시 환웅의 동방 백두산 문명 개창시에 송화강, 백두산 일대에는 토착민인 웅족과
호족이 살고 있었는데, 원주민은 호족이었고, 이주민은 웅족이었다.
호족은 사납고 약탈에 능했으나 점차 이들은 웅씨족에 의해 융합되었다.
웅의 음은 검이며 검은 신으로 불리었다. 또한 호는 불로, 불은 시로 변하였다.
그래서 두 민족의 협력 건국으로 인하여 환웅께서 수도를 신시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 신시 배달국 시대의 통치자인 환웅은 '큰 스승'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대웅전이라 하는데 이는 거룩한 스승을 모신 성전이라는 뜻이다.
환웅이란 당시 광명 민족을 이끌어 주던 거룩한 스승이라는 뜻이다.
배달국 시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배달국의 말기 단웅께서 웅씨 왕녀와 결혼하여 낳은 분이 초대 단국 성조이다.
단군 성조는 신묘년(BC 2370) 5월 2일에 탄생하였다. 신인의 덕으로 원근에서
외경하여 14세 되는 갑진년에 웅씨왕으로부터 비왕으로 임명받아 24년간 대읍국의
국사를 섭정하였다. 38세 되는 무진년에 단군으로부터 돌아와 마지막 환웅천황께서
돌아가시자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통치자를 겸임한다는 의미의 관명이다.
단군 성조께서는 환인과 환웅 천황의 정통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옛 신교정신을 부흥시키고, 동방 문명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황아/양자강 유역, 만주 등의 동아시아 대부분을 통치하였다.
전 영토를 삼한으로 나누어 부단군 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다.
만주와 중국 북부를 관할하던 진한은 단군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중국 동부는 번한, 한반도와 일본은 마한이 통치하였다.
이렇게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그 당시 조선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환단고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역사 지식을 완전히 뒤엎는 사실들을 담고 있다.
그곳에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를 통한 위대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과거에 우리가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까지 다스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그곳에는 새롭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놀라우면서, 믿기 어려운 몇 가지 기록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환단고기에는 우리의 역사 시작을 일 만년 전으로 잡고 있다.
우리가 단군 조선을 기점으로 반만년이라 이야기를 하는데,
환단고기에서는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시대가 7대 3301년이 있기에
우리의 역사는 9천년을 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영토를 이야기 할 수 있겠다.
'환단고기-삼성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파내류산 아래 환인의 나라가 있는데 천해 동쪽 땅이다.
그 땅의 넓이가 남북 5만리 동서 2만 여리에 이른다."
이 문구를 근거로 그 당시 우리민족의 영토를 짐작해 본다면,
파내류산은 지금의 시베리아 중앙고원에 해당하고,
천해는 바이칼 호수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아시아 대륙을 넘어
지금의 러시아에까지 미치고 있다. 말 그대로 남북 5만리와
동서 2만리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환국은 열 두 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 수밀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수밀이국을 일부에서는 고대 수메르로 해석을 하는데,
수메르족은 세계의 4대 문명 중에 하나인 메소포다미아 문명을 일으켰던 민족이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서쪽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바로 우리라는 소리다
다음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중국에게 문명의 대부분을 받아 왔다고 배워왔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그 중국의 역사가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대 환웅의 막내아들은 태호복희라고 한다. 태호복희는 삼황오제 중
첫 번째 인물로 우사라는 관직에 있다가 진으로 갔다."
태호복희는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의 시조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바로 그 사람이 환웅의 아들이었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듯 '환단고기'에는 놀라운 기록들이 많다.
○ 「환단고기」의 작자에 관하여
환단고기는 네 권의 책을 단행본으로 묶이어 전하고 있다.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각 4권의 저자 이름은 다르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도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르다.
그리고 이들 저자 중에는 이암, 이맥, 범장처럼 다른 사료에서도
그 행적이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썼는 가에 대한 기록은 다른 사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또한, 저자들 중에는 다른 사료에서 그 사람의 행적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다른 사료에 이들의 확실한 행적이나 환단고기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면
환단고기를 다루는 정도가 훨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은 1911년 네 권의 책이 한 권으로 묶여서 '환단고기'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책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신시개천 5808년 곧 광무 15년
신해 5월 광개절날에 태백 유도 선천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
"이 내용을 살펴본다면, 1911년 네 권의 책을 묶은 사람은 계연수 이고,
환단고기를 필사한 장소는 묘향산 단굴암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계연수가 펴냈다는 환단고기의 원본은 전하고 있지 않고 있다.
계연수의 행적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다만 짐작하는 것은 대종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였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후 7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이유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다.
이유립은 단군사상을 연구하는 단단학회의 회장을 지낸 재야사학자였다.
1979년 발표된 환단고기는 우리 나라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일본인 손에 넘어가서 새로이 번역되면서, 그것이 역수입되어 관심을 받게 되었다.
환단고기에 대해 나름대로 속시원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이 책의 공개자인
이유립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2. 「환단고기」에서의 상고사와 기존의 단군신화의 비교
환단고기에서 가장 논거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단군신화와는 완전히 그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과연, 단군에 대한 내용을 신화로써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실제 역사로써 인정을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몇몇 역사 기록을 토대로 신화 쪽에 무게를 두어왔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실제 역사로써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구체적인 비교를 하기 이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존의 단군신화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다.
단군신화는 크게 3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첫째는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신시를 열게 된 연원을 밝힌 내용이고,
둘째는 환웅이 곰과 결혼함으로써 단군왕검을 낳게 되는 과정을 밝힌 내용이다.
셋째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개국하였다는 내용이다.
기존의 단군신화에서 '환인과 환웅'을 인간이 아닌 단지 그 이상으로 보고 있다.
바로 신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써 상징성과 설화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이 단어들의 명칭을 보다 구체적으로 관직이나
제사장의 명으로 보고 있다. 물론 '단군'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는, 환웅이 곰과 결혼하여 단군을 나았다고 했는데,
이 것은 '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당시 토착종족인 웅족으로 환웅이
그 웅족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환단고기에서는 보고 있다.
기존의 단군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처음 실려 있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단군이 고조선을 통치한 기간이
1500년이며 수명은 1908세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환단고기에서는 2천년이 넘게 지속된 고조선을 한 사람이 통치한 것이 아니라
47명의 단군이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객관적으로 놓고 봤을 때,
기존의 단군에 대한 기록보다는 환단고기에 실린 내용이 훨 자연스럽다.
한 사람이 그렇게 긴 시간을 통치한다는 것과 더구나 천년이 넘게 살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기에 단군에 대한 기록을 신화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환단고기가 정확한 사료로서 인정이 된다면,
단군신화는 구체적인 자료를 근거로 역사적 사실로 남게된다.
그렇다 문제는 그것이다. '환단고기'란 책이 역사적 사료로서 인정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3.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논쟁
○ 「환단고기」는 사료로서 무가치하다는 주장
사료로서 무가치를 주장하는 쪽은 대부분 학계이다.
그들은 먼저 환단고기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음을 들고 있다.
환단고기 저자들의 행적이 확실치 않으며, 그들에 대한 기록이
다른 사료에 자세히 나와 있지도 않고, 어느 곳에도 그들이 환단고기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타나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단고기를 단행본으로
만든 계연수의 행적도 알 수 없으며, 70년 후에 이유립이
책을 발간하였는지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책의 출처가 정확하지 않기에 학계에서는 사료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것이 가장 큰 부정이유인 듯 하다.
다음은 환단고기의 책에서 발견되는 근거들이다.
환단고기에는 이런 문장이 기록되어있다.
"백성들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니 한 사람도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이가 없었다."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이 문장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부분이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산업, 문화'같은 용어는
근대에 등장한 단어로 고려시대에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어'국가, 인류, 전세계, 남녀평등'이란 말이 환단고기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런 단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단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환단고기는 사료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환단고기를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는 또 있다.
그것은 다른 책을 베낀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 중에는 많은 부분이 다른 사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호구가 1억 8천만 구로써,
인구로는 9억이 넘은 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인구통계표가
천만을 넘지 못하는데, 너무 무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들로 인하여 환단고기는 학계에서는 찬밥신세다.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
사료로서 가치를 주장하는 쪽은 주로 재야사학계이다.
주장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조선의 영역에 나타나는
비파형 동검의 출토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다.
마지막으로는 환단고기에 나타난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들이
과학적으로 사실로 판명이 된 것이다.
먼저, 환단고기를 토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의 전지역과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한 시대의 영토를 추정하는 방법 중에는 문헌에 나타난 기록과
그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참고로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청동무기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로,
당시 지배층의 독점물로써 중앙에서 만들어 지방에 공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같은 청동기가 사용된 지역은 한 통치집단에 의해서 지배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비파형 동검이 지금의 북경지역, 만주, 한반도 전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고조선의 영토는 북경지역, 만주, 한반도 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환단고기에서 이야기하는 고조선의 영토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수서령'이란 부분이다.
수서령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성종 때 팔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옛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 이 수서령이 내려진 책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묙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삼성기'이다.
수서령의 대상이 되었던 책이 환단고기의 제목으로 나타나는 것은
계연수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책들을 참고하였다는 근거를 낳게 된다.
■ 결론을 내려 본다면
우리의 상고사는 너무도 빈약하다. 가깝게는 백제의 문화적 기록도 부족하다.
물론, 일제시대 일본의 상고사 말살정책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해방이후에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단군조선은 그저 하나의 신화로서 동화책 < 북한의 단군릉> 같은이야기만을
놓아둔 체 손을 데지 않았다. 이에 비해,
중국과 일본은 억지스럽게 자기네들의 상고사를 찾고 있으며,
더구나 일본은 그것을 소재로 만화영화까지 만들어 수출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1994년부터 평양 동쪽 강동군에 단군릉을 복원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인정하는 재야사학계에서는 북한의 단군릉을 단군 조선시대
5번째 통치자인 구을 단군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토록 메말라 있던 상고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책들이 나왔음에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으니 한심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단고기 등과 같은 책이 아니다.
우리의 상고사를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집요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기록을 중국에 맞추어 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듯 싶다.
○ 참고 문헌
『환단고기』, 계연수. 코리아북스
자료수집및 작성 : 돌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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