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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우리의 고구려 역사

사오정버섯 2007. 2. 19. 16:15

1. '하늘'과 '물'의 정령 주몽왕

북부여 땅을 탈출하여 추격하는 병사들을 따돌리며 내달리는 주몽 앞에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치고 있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숨 고를 틈도 없이 주몽은 활로 수면을 내리치면서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고 하백(河伯: 강의 신)의 외손자다.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라"고 외치자, 물고기와 자라떼가 일제히 떠올라 다리를 놓았다. 주몽이 건너자 이들은 다시 흩어져 추격하는 병사들은 건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하늘'과 '물'의 정령이 결합된 주몽은 왕자(王者)로서 초능력을 부여받았기에 시련을 통과하는 불사신의 신체를 획득하였다. 그랬기에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그의 사망을 하늘이 황룡을 보내 맞아갔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주몽은 고구려 건국을 위해 하늘의 대리자로서 지상에 내려왔고 그 사명이 끝나자 원향(原鄕)인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몽왕의 도하설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 고구려인들에게는 긍지의 원천이기도 했다.

2. 사냥터에서 즉위한 미천왕

흉노의 묵특 선우가 가을의 대규모 수렵대회를 이용해서 부왕을 살해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고구려에서 수상격인 국상 벼슬의 창조리도 그 기회를 이용하여 거사했다. 창조리는 가을에 폭군인 봉상왕이 후산(侯山) 북쪽으로 사냥 나갔을 때, 따르던 무리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내가 하는대로 하라"면서 갈댓잎을 모자 위에 꽂았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일제히 그렇게 하였다. 모자 위에 꽂는 갈댓잎은 일치의 상징으로 결사를 도모할 때 서약으로 이용되었다.

무리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 마음이 일치한다고 확신한 창조리는 즉각 사냥터에서 봉상왕을 감금한 후 폐위하고 왕손인 을불(乙弗)을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400년간 중국의 식민지였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미천왕이다. 사냥터는 때로는 왕위 계승이라든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장소였거니와, 또 그와 같은 기능은 유목사회적 전통이었다. 고구려의 역동성을 확인해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3.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6년조(396년)에 의하면 광개토왕이


직접 이끈 수군은 지금의 한강인 아리수를 건너 백제 왕성을 급습해서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백제왕은 영원히 비천한 노예가 되겠다고 광개토왕에게 맹세하였다. 아울러 백제왕은 남녀 노예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 그리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볼모로 바쳤다. 광개토왕은 나아가 백제의 58성과 700개의 촌락을 확보하였다. 광개토왕은 조부인 고국원왕이 백제군에 피살된 지 25년 만에 완벽하게 복수를 한 것이었다. 19세의 광개토왕이 한강 유역에 처음 진출해서 백제를 압박한 지 4년 만에 일단의 결산을 보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58성의 소재지는 대략 예성강에서 임진강선과 남한강 상류 지역으로 추측된다. 특히 백제로부터 확보한 남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와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이라는 원대한 남진(南進) 구도와 관련이 있다. 고구려는 이때 보급-수송 루트인 소백산맥 이북의 충주와 단양, 제천을 비롯한 강원도 내륙 지역을 장악했다. 영락 6년의 백제 정벌은 고구려 남진 경영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4. 중국의 왕을 살해하다

북중국의 강자인 북위(北魏)의 공격을 받아 멸망 직전에 있던 북연왕(北燕王) 풍홍(馮弘)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장수왕은 436년에 북위의 반대와 협박을 묵살하고 병사들을 보내 풍홍을 구출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풍홍이 망명객이 되어 고구려에 오자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馮君)이 야외로 행차하느라고 군사와 말이 피로하겠습니다"라고 조롱하였다. 장수왕은 그러나 풍홍이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황제처럼 행세하며 교만하게 굴자 시종하는 인원을 대폭 줄이고 그 태자를 볼모로 잡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풍홍은 남중국의 유송(劉宋)으로 망명하려 했다. 유송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풍홍을 자국으로 보내라고 요청했지만, 장수왕은 오히려 풍홍과 그 손자 10여명을 죽였다. 아울러 장수왕은 풍홍을 맞으러 왔던 유송의 병사 7,000명도 생포하여 유송으로 압송하였다. 고구려의 눈치를 보던 유송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투옥했다. 남북조인 북위와 유송 사이에서 당당하게 처신하는 고구려의 자주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장면이다.

 

 

 

 

 

5. 국제적인 강국의 면모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선을 넘어 북중국의 북위와 대치하고 남쪽으로는 금강과 영덕을 잇는 선까지 내려왔다.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까지, 동쪽으로는 두만강 하구에 다다랐다. 즉 장수왕은 475년에 한성을 함락한 후 백제를 금강 유역까지 밀어붙였고 신라 땅에는 병력을 주둔시켜 강력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게다가 고구려는 유목국가인 유연(柔然)과 더불어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소재한 거란족의 일파인 지두우(地豆于) 분할을 시도하였으니 그 영향력은 몽골 고원지대까지 미쳤다. 이러한 배경 위에 484년에 북위에 파견되어 온 사신의 서열을 보면 남조인 남제(南齊)가 1위, 고구려가 2위를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동아시아와 북아시아 전역에서 북위 및 남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책부원귀]에서 고구려의 강성과 관련해 이 구절을 언급했다. 489년에는 북위에 온 남제 사신이 고구려 사신과 동급으로 취급받는데 대해 불만으로 항의할 정도였다. 고구려의 국력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6. 안장왕의 로맨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에 보면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포함되는 왕봉현(王逢縣)과 달을성현(達乙省縣)이라는 2개 고을에 관한 기록이 잡힌다. 그런데 왕봉현과 달을성현 항목에는 이례적으로 짤막한 지명 유래가 담겨 있다. 즉 왕봉현은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지역이라 왕봉으로 불렀다"라고 적어 놓았다. 달을성현은 "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올리고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기 때문에 뒷날 고봉(高烽)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날 고양시에 우뚝 솟은 고봉산의 봉수가 그것이다.

안장왕은 6세기 전반기에 재위한 고구려 제22대 국왕이다. 그는 남순(南巡)하여 한강 하류의 북안인 지금의 고양시 부근에서 한씨 미녀를 만나 일종의 로맨스를 남겼던 것 같다. 그랬기에 임금이 누구를 만났다는 뜻을 담은 '왕봉현'이라는 지명으로 그 사연이 실낱같이 전해지게 되었다. 냉혹하게만 느껴졌던 고구려왕의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7

. 온달 장군의 전사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1년)의 사위로 전해지는 온달 장군은 고구려가 절치부심하던 한강 유역 회복을 위해 출정을 자원했다. 그는 떠나면서 "계립현(문경 새재의 동쪽에 위치한 하늘재)과 죽령(풍기 북쪽에 위치한 고개) 서쪽을 우리 땅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고구려 군대를 이끌던 온달 장군은 신라 군대와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으로 짐작되는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온달 장군의 관을 운구하려는데 땅에서 옴짝달싹 않은 채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비보를 접하고 내려온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관이 땅에서 떨어졌다고 [삼국사기]의 온달전은 전하고 있다. 비장하게 느껴지는 이 장면에는 서약의 중요성과 국토 수호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다.

8. 물귀신 된 수나라 30만 대군

수양제는 612년에 1백13만여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보급 부대까지 합치면 무려 3백만명에 이르는, 세계 전쟁역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규모였다. 이때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에 가서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는 그 허실을 살피고 돌아왔다. 이후 을지문덕은 추격해 오는 수나라 군대에 거짓 패하여 수나라 군대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30리 되는 곳까지 이르자 을지문덕은 "신통한 전략은 천문(天文)을 꿰뚫고 기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하였네, 싸움에서 이겨 공로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라는 내용의 오언시(五言詩)를 보내 적장을 희롱하였다. 수나라 장군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을 핑계 삼아 회군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에 이르러 반쯤 건넜을 때 후미를 급습하였다. 수나라 장군 신세웅을 비롯한 전군이 궤멸되었다. 30만5천명의 수나라 군대는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하루낮 하룻밤에 4백50리를 도망간 것이었다. 이들이 요동에 이르렀을 때 생환자는 겨우 2,700명이었을 정도로 참담하게 패했다.

9.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

귀족인데다 체구가 당당하고

성품도 호방한 연개소문에게 정치적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영류왕과 모의하여 그를 살해하려고 했다. 이러한 낌새를 포착한 연개소문은 642년에 반대파 귀족들을 초청한 후 주연장을 덮쳐 200명에 가까운 귀족들을 참살하였다. 이어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살해하고 그 조카를 왕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최고위직인 막리지가 되어 전권을 틀어쥐었다.

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어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는 말에 오르고 내릴 때면 귀족이나 장수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대오를 갖추었다. 앞에서 길라잡이가 긴 소리로 외치면 길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달아나면서 구덩이도 피하지 않았다. 가위 하늘을 찌를 듯한 위세였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는 직접 당나라 장수 방효태와 그 아들 13명을 비롯해 전군을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연개소문은 당태종이 보낸 사신들을 토굴에 감금하기까지 하였다. 송나라 신종은 그러한 연개소문을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했다.

10. 당태종도 손 든 안시성 전투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한 당나라 군대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해성(海城)에 위치한 안시성을 포위하였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안시성주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굳세게 항전했다. 당나라 군대는 60여 일 동안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높은 흙산을 쌓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성을 공격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하루에도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사흘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당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안시성주는 성 마루에 올라와 손을 모아 절을 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당태종은 비록 적군이지만 그가 성을 잘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비단 100필을 선물하였고 또 임금 섬기는 절의(節義)를 격려하고는 황급히 철군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 명목상의 이유는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연개소문을 응징한다는 것이었다. 안시성주는 그러한 연개소문에게도 굴하지 않은 지사였다. 당태종의 야욕을 좌절시킨 안시성의 전승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위상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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