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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항명이 팔만대장경을 지켰다

사오정버섯 2007. 2. 19. 15:55

목숨을 건 항명이 팔만대장경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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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공군사상 최초로 전선으로 출격하는 F-51 전폭기들

 

인류가 다 함께 힘을 모아 지켜야할 유산,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인 경남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 그리고 그곳에 보존돼 있는 팔만대장경.
이 두가지 소중한 유산은 늘 그곳에 있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6·25 당시 이곳은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미처 퇴각하지 못하고 낙오한 수많은 북한군이 이곳으로 숨어들어 해인사를 거점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으며 한국군과 유엔군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전개했었습니다. 물론 폭격기를 동원한 폭격도 수없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피해 없이 지금까지 우리곁에 있습니다.

당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아군의 폭격에 잿더미로 변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위기에서 팔만대장경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항명'이었습니다. 유엔군 측으로 부터 폭격명령을 받은 한국 공군의 조종사가 "빨치산 몇명 죽이기 위해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불태울 수는 없다"며 폭격 명령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간첩으로 몰리거나 이적행위로 간주돼 현장에서 처형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목숨을 걸고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것입니다.

일반에는 거의 알려 지지 않았던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글이 최근 인터넷에 올라와 네티즌들 사이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글의 요지는 6.25 전쟁 때 북한군 수백여명이 해인사에 도주해 들어가고, 이를 공격하던 한국 공군 편대장은 편대기 4대를 몰고 출격, 해인사에 숨어있는 북한군을 포격하라는 UN군 측의 명령을 받지만, 이에 항명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켰다는 내용입니다. 즉 항명한 편대장 덕분에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내용이지만 글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글에는 편대장의 이름이 김영환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2002년 6월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공적비가 해인사 경내에 세워진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에 대해서는 "1951년 9월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아 해인사 폭격을 지시받았으나 명령에 불복,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의 소실을 막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연합뉴스 '해인사에 빨간 마후라 공덕비' 기사보기

검색해 본 결과 이 글은 충북향토사연구협의회 회장 김예식 선생이 쓴 것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김영환 장군을 찾아가는 과정과 동명이인인 김영환 장군에게 받은 '보라매 얼'이라는 책 내용을 그대로 글에 적었다"고 말했습니다.

공군 문화홍보과 담당자는 "김영환 장군이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소실을 막은 영웅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보라매 얼'에 그런 내용이 실렸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고, 공군전우회(前 보라매회) 담당자는 "워낙 오래된 것이라 확인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아래에 김예식 회장이 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사수한 별들의 이야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게 한 우리 공군 편대장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6. 25사변이 발발하고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전쟁다운 전쟁도 없이 충북지역의 음성 가므재전투와 충주 동락전투 그리고 다부동 전투로 이어지며 전선은 대구 팔공산전투 낙동강 최후 방어선!

피난 수도는 부산이고 경상남도 일부만이 남아있을 때, UN군 맥아더 사령관이 9월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어 길고도 긴 3개월의 악몽이 사라질 무렵 인민군들이 지리산 일대로 몰려 소백산맥으로 도주의 길을 택하면서 전선이 아닌 후방 북한군 소탕작전이 감행되고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형세로 될 때 해인사 근처의 북한군 토벌 명령을 받은 공군편대장의 기억은 이러하다.

해인사에 집결한 북한군 소탕작전에 한국 공군편대가 투입된다. UN군 작전명령을 받은 편대장은 편대기 4대를 몰고 출격, 북한군을 무차별 포격하여 불바다를 만들도록 명령을 받는다. 우리 공군 편대장은 해인사 폭격을 중지하고 항명한다. 항명을 한 편대장이 UN군 작전사령부에 호출되어 힐책을 받을 때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단다.

“해인사는 법보(法寶) 사찰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우리나라 삼대 명찰중의 하나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이것을 불태울 수 없을 뿐아니라 불교신자인 나로서는 더더욱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영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와 인도와는 바꿀 수가 없다’ 한단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해인사 팔만대장경과는 바꿀 수가 없는 보물중의 보물이다.’ 그리하여 폭격을 하지 아니하고 항명을 하였다.”고 당당히 말하자, UN군 작전장교는 한국군 편대장의 조국의 문화 사랑에 감복을 했다는 내용으로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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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 [동아일보]▲

 

문화재에 얽힌 비화를 준비하면서 이 엄청난 사실이 어딘가엔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 그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충주 근처에 공군부대가 있다. 부대 정보참모 면회 신청을 하고 방문하여 그 부대 정보장교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본부에 알아서 통보해준다 하고 몇 달이 지난 후 확인하였더니 그 정보장교는 본부에서 자세한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은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에 참전했던 편대장이나 편대원 누구라도 찾아 내용을 알기 위함이었는데……

마침 충주 엄정면 출신 령관급 장교를 알게 되어 그로 하여금 당시의 편대장을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 편대장은 김영환 장군인데 청주에 살고 있다면서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즉시 전화를 하였더니 그 김영환 장군이 직접 받는데, “사람을 잘 만나지 아니하고 은거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에 만나려고 하는지 사유를 대라”고 하셨다.

어렵게 청주관광호텔 커피숍에서 김영환 장군을 만나 뵙고 문화재에 따른 비화를 듣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리니 그 분은 동명이인이란다. 그러면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폭격으로부터 구했다는 사실과 그 편대장의 인적사항도 소상하게 제보해 주면서 책 한 권을 빌려주시었다.

'보라매 얼'(1979. 12. 24 刊)이라는 공군에서 퇴역하신 분들의 모임인 보라매회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였다. 그 책에 김영환(金榮煥) 장군의 추모기사도 상세하게 소개되었을 뿐아니라 당시 같은 편대원이었던 서상순(徐商純)씨의 ‘공비토벌출격기’(가야산 해인사를 중심으로)의 수기식 증언이 실려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자료가 없을 것 같고 널리 알려져야할 일이기에 전재하여 비화로 소개한다.

공비토벌출격기 - 가야산 해인사를 중심으로 - 서상순


          ▲김영환 장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들은 막강한 대군으로 일거에 남한을 파멸시키려 하였으나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3개월이 못되어 그 야망을 여지없이 분쇄시켰었다.
그들은 막대한 인명의 손실은 물론 보급품, 장비, 대전차포까지도 모조리 버리고 도망쳤으나 퇴로가 막힌 패잔병들은 남한 각지 산악지대에 숨었으며 지리산에서는 6천 5백, 가야산에는 9백여명이 모여 후방 치안을 교란시키고 인근 지역을 위협하였다.

서남지구 특별경찰대가 지리산 공비토벌에 임하였으나 장비와 수적인 미흡으로 임무수행이 어려워 1951년 7월부터 우리 공군이 합동작전을 폈으며, 그 해 12월에 육군도 가담하여 지공 합동으로 토벌전이 전개되었다. … (중략) …

그해 12월 18일 있었던 일이다. 며칠 계속되어 내린 진눈깨비로 공기가 습하고 지리산 높은 골짜기마다 안개구름이 깔렸으나 동쪽 아롱산 능선 사이로 눈부신 아침 해가 밝아와 그동안 피로를 푼 전투조종사들은 마음대로 푸른 하늘을 날며 종횡무진 곤두박질치며 마음껏 때려부수고 싶은 감정에 설레었다. 6시 30분 아침식사가 끝났을 때 벌써 작전참모 장지량 중령이 직접 적정을 공중정찰하고 돌아와 ‘찌르릉’ 하고 긴급출동을 알리는 비상벨이 울렸다.

아직까지 전례로 보아 우기에는 아군이 불리하고 맑은 날에는 승전하였으며, 또 야간에는 적이 활기를 띠고 주간에는 아군이 전승하였으니까 말이다.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나에게도 출격명령이 내렸다. 얼마 뒤 우리 편대기들은 낙동강 줄기를 따라 북상하다가 비행지휘관 김영환 대령이 인솔하는대로 함안 상공에서 기수를 산악지대로 돌려 얼마 안가 협천 상공 8백feet에서 ‘모스키토’(미 5공군 정찰기명)와 만나라는 무전명령을 받았었다.

우리 4기 편대는 김대령의 1번기, 2번기가 강호륜, 3번기가 박희동, 4번기가 필자 등 강팀이었다. 정찰기의 훈령은 가야산 동남으로 산줄기와 산줄기, 계곡과 계곡 사이로 조그마한 냇물이 흐르는데 그 중 한 능선이 흐르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울창한 산림을 이루어 삼태기 모양의 형국 안에 온화하게 보이는 분지에 소복히 내려다 보이는 사찰과 인근의 소굴을 폭격하여 지상군을 지원하는 것이다.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38호기가 정세를 일독하고자 ‘모스키도’ 뒤를 따라 계곡으로 급강하하였다.

그러자 사찰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황히 숲속으로 도피하는 모습, 잘 위장된 참호며 능선을 따라 곳곳에 구축된 진지 등 공비들의 불야성이라 할 수 있었다. 계곡 동쪽 신작로를 따라 긴 언덕 위에 아군임을 알리는 주홍색 T자형 대공포판이 깔렸는데 그 곳에 진을 친 지상군이 손을 흔들며 기뻐했다. 우리들은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 5촌 로케트탄 6개, 캬리바 50, 기관총 1,800발씩 장비하였고 기장만은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바로 해인사 큰절 마당에 떨어져 백색 연막이 선명하게 목표를 가리켰다.

네이팜탄 한발이면 온 사찰을 잿더미로 바꾸고 각기의 무장으로 공비의 소굴을 뿌리뽑을 수 있어 우리들의 마음은 전의에 부풀었다. 이윽고 편대장기가 급상승 선회하며 요기에 명령했다.
“각 기는 편대장의 뒤를 따르되 편대장의 지시없이 폭탄과 로케트탄을 사용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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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을 감행하는 공군기▲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소사공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명령대로 교묘히 위장된 적의 아지트를 찾아 소사하여 큰 타격을 주었으며, 산정에서 계곡으로 마침내 궁지에 몰린 적이 우왕좌왕하고 사찰 주변으로 몰리며 숲 사이에서 최후 발악인 양 우리들에게 지상 포화를 퍼붓고 있음을 알았다. 이때 또다시 정찰기에서 독촉훈령이 라디오를 통해 내렸다.
“해인사를 네이팜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잠시후 사찰이 불바다가 될 것을 생각하자 통쾌감마저 앞섰다. 그때,
“편대장님, 많은 적이 해인사로 몰리고 있습니다.”
나는 빨리 공격하자고 재촉보고를 하였다.
“각 기는 공격을 하지 말라.”
하고 대장님의 날카로운 명령이 다시 라디오를 통해 들렸다.

“라자, 라자.(알았습니다)”
하고 또 명령에 따르자 일렬종대로 해인사를 향해 동에서 서로 법당 용마루를 지나면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의 간판도 똑똑히 보였다. 숲 속에 많은 적이 모여 앉은 것을 보고 얄미워 로케트탄의 세례를 퍼붓고 싶은 충동도 있었으나 급상승 선회하다가 그뒤 해인사 뒷산 몇 개의 능선을 넘어 폭탄과 로케트탄으로 적을 무찔렀다.

그날 저녁 일이다. 미 공군 고문단의 XX장교가 공지합동작전본부에서 장교를 대동하고 왔는데 편대 전원이 전대장실에 모였다.

냉랭한 분위기에 공지합동작전에서 왔다는 소령이 오늘 가야산 목표를 유도한 정찰장교였다고 소개하므로 나는 오늘의 명령불응을 직감했다. 그는 심각한 어조로,
“오늘 저에게 불찰이 있었습니까?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김영환 장군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니요,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고 묵직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그런데 목표를 알리는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셨습니까?”
“네.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엉뚱한 곳을 공격하더군요. 왜 제가 공격을 중지하고 귀대하라고 훈령하였는지 아십니까?”

김대령님의 온화한 눈초리를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령께서는 지상군의 요청에 따라 목표를 지시하였겠지만 그것은 사찰이 아니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사찰이 전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김대령님은 국가보다도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지요.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할 것이야 없지요. 그러나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공비란 어디까지나 유동물(流動物)입니다. 그들은 일정한 전선을 형성하지 않고 있으며, 일단 그 지역에서 몰아내도 다시 침입해 오는 것이 특징이 아니겠오? 따라서 지리산 지구가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요, 낮에는 대한민국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오.”

“그러면 김대령님은 공비들을 언제까지나 방치해 두자는 것이 아닙니까?”

“천만에… 해인사는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그들이 현 정황으로 장기간 유지해 나갈 수 없는 독안에 든 쥐! 단지 놈들이 지리산 근거지로 통하는 통로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팔만대장경이란 세계적인 국보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인 문화재가 있습니다. 가야산에 출몰하는 공비 몇 백명을 살상하였다 해서 전쟁을 판가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절은 1,300년의 역사가 있고 고려 고종 24년에서 38년, 15년에 걸쳐 8만여면에 달하는 대장경을 판각해(750년전) 봉안하 우리나라 국보사찰입니다. 소령께서도 가장 가까운 예로 2차 대전때 유럽의 파리와 일본의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실정을 아실 것입니다. 그 처참한 대전에서도 이 도시들은 총탄 한발 맞지 않고 오늘도 그대로 인류의 귀중한 문화재로 남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들의 공중 공격을 받고 사찰로 모여든 사람들은 반드시 납치되었던 양민들이 공습을 틈타 적에게서 벗어나온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또 지상군의 보고도 그렇습니다.”

그 말씀에 나는 과연 편대장님의 판단이 정확한데 또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그 소령은 얼굴에 누그러진 미안한 빛을 띠우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동자세를 취하고 손을 들어 경례를 하며 이해와 존경을 표시하고,
“김영환 대령님 같은 훌륭한 상관을 모신 대한민국의 공군 장병들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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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환(金榮煥) 장군은 어떤 분인가
- 또다른 김영환 장군(현 청주거주)이 들려준 이야기 -

1. 장군의 인간상

1954년 8월 5일.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한 사람이며 한국전쟁을 통해 하늘을 누비며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오던 조국의 영원한 수호신 김영환 장군이 애석하게도 산화한 날이다.
장군은 1921년 1월 8일, 서울특별시 서대문로에서 태어나 경기중학을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관서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보아 어쩔 수 없이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교, 소위로 임관하여 잠시 일군에 복무하였다.
조국이 해방되자 김장군은 ‘국방 없이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는 신념 아래 오늘날 육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 간부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국토방우와 치안유지에 온갖 정열을 기울였던 것이다.
1948년 4월 1일에 이르러 ‘국방을 위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은 공군이 담당하여야 한다.’고 확신하고 통위부 정보 및 작전국장이라는 요직을 자진 사임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규합, 공군창설 7인간부의 한 사람으로 행동을 같이 하였다.
장군은 휘하 장병들을 지휘함에 있어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함으로써 부하들이 이를 따르게 하였다. 장군은 엄격하고 철저한 군인정신의 소유자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문학을 동경하였던 정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포근한 인정미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풍부한 인간성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장군의 인간성의 편모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장군이 전투비행단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경기중학 동기동창생이 대학강사 생활을 하다가 군에 입대, 대위 계급장을 달고 당시 대령이었던 김장군에게 신고를 하게 되었다.
“신고합니다.”
무심코 신고를 받던 김장군은 부동자세를 취하고 신고를 하던 동창생을 보더니 신고도 받지 않은 채 대동했던 인사참모를 단장실 밖으로 나가게 한 후,
“야, 임마. 동창생끼리 신고합니다가 뭐야? 이리와 앉아. 너 인간 덜되었구나.”
하면서 와락 동창생의 어깨를 껴안았다.
또한 장군은 계급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출격하고 돌아오면 등을 두드리며 그 노고를 위로하고 출격담을 듣는 등 친형처럼 정을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단장이라는 위엄만 갖추려 하지 않고 장병들과 더불어 술자리도 곧잘 갖곤 하였다.
그는 상관의 계급 뒤에 붙이는 ‘님’자를 전혀 못쓰게 했다. 서로간에 거리감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장군은 불필요하고 형식적인 보고절차와 표어 첨부를 일체 엄금할만큼 실질을 중요시하는 생활관을 택하였다.
장군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담배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놓고 아무리 하급자라도 담배를 태우고 싶을 땐 서슴치 않고 들어와서 태우도록 신경을 쓴 자상한 인정을 베풀었다.
다분히 문학적인 장군이 미 공군대학에서 돌아와서 보고를 하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유난히도 빛나는 십자성을 남쪽에서 바라보며……’
공군의 빨간 머풀러 창시자도 또한 그였고, ‘산돼지’라는 별명의 장본인도 또한 그였는데, 김정렬 초대 참모총장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2. 공군발전의 초석인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감행하였을 때, 적의 YAK기를 포함한 200여대의 전투기에 비하여 우리 공군은 전투기는 물론 대공화기 하나 변변히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다만 L-4, L-5, L-6 등 경비행기 20여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장군을 비롯한 우리 조종사들은 비록 경비행기나마 급조한 폭탄의 에나멜칠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적진으로 날아 손으로 투하하는 등 목숨을 건 혈투를 계속 하였다.
김장군은 다른 9명의 조종사들과 함께 대망의 F-51 전투기 무스탕을 인수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고, 인수한 이튿날부터 출격을 감행하였다.
전쟁 초기, 김장군은 비행단의 참모장으로 항상 탁월한 지휘통솔력으로 교육훈련에 총력을 집중하는 한편 적진에도 과감히 작전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솔선수범하였다.
1951년 8월 1일부터는 제1전투비행단 부단장 겸 제10전투비행단 전대장으로서 우리 공군의 단독출격작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우는 한편 직접 출격을 감행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하는 동시에 적에게 치명적 손실을 가하였으며, 그간 우리 공군의 크나큰 전과는 김장군의 힘이 컸다고 아니할 수 없다.
1951년 말 제1차 미 공군대학 유학장교단의 일원으로 도미하였고, 귀국 후에는 다시 제1전투비행단 부단장으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술공군의 진두지휘와 기지건설에 헌신하여 마침내 10전투비행단이 창설되게 되었다.
1953년 2월 15일, 장군은 제10전투비행단장으로 취임하여 효과적인 작전수행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노력하였고, 이로써 적은 많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가 공군에 남긴 일은 많다. 한마디로 그는 공군 발전의 초석으로서 오늘날 공군을 가져오게 한 빼놓을 수 없는 수훈을 세운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팔만대장경을 구한 불보살의 화현

가야산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고려대장경”판이 한국전쟁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사하였던 것은 기적이다.
이 기적의 뒤에는 김영환 장군을 필두로 한 우리 공군 장병들의 문화적인 안목이 없었다면 한낱 잿더미로 화했을 것이다.
원래 이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15년의 세월에 걸쳐 8만 1천 2백 5십 8장을 한자 한자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고 사간본(寺刊本)도 4,845매나 있어 불교계의 법보사찰(法寶寺刹)이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주초가 되어 왔는데 전란을 통하여 아슬아슬하게 세 번이나 폭격을 피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김영환 장군이 이 대장경판을 사수하게 된 경위는 서상순 대위(당시)의 증언으로 대신한다

 

내가 부를 너의 이름-노래 / 김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