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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허준

사오정버섯 2007. 2. 20. 21:06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명의 허준
환자 돌보기를 내 생명과 같이…의학계의 본보기로 남아

우리 나라 최고의 한의서로 불리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은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인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 이 훌륭한 의학 서적을 지은 사람이 바로 ‘조선 시대의 명의’ 허준입니다.

허준은 비록 용천부사 허론의 서자로 태어나 높은 벼슬을 할 수 없었지만, 실망하지 않고 한의사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임금을 치료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어의(御醫)가 되었습니다.

◎ 서자의 한계 알고 한의사의 길 선택

허준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습니다. 서당에서 글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서자(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신분이어서 과거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번 과거를 잘 치르게나. 난 친구들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네.”

“공부는 자네가 더 많이 했는데, 서자라 과거를 못 본다니 참 안타깝네.”

허준은 과거를 치르러 떠나는 친구들을 멀리 서서 지켜 보면서 한숨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야 했습니다.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서자는 중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허준은 과학자나 한의사의 길을 택해야 하겠다고 다시 목표를 정했습니다.

당시 중인 직업으로는 역학ㆍ화원ㆍ역관(통역)ㆍ의관(의사) 등이 있었습니다.

허준은 한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후 유교 경전과 의학서를 두루 공부하였습니다.

얼마 후 허준은 전라도 지역의 심약(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검사하기 위해 지역에 파견했던 종9품의 벼슬)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유희춘은 허준이 환자를 돌보는 일을 마치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유희춘은 얼마 후 내의원 양예수에게 허준을 추천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내 얼굴에 난 종기를 깨끗이 치료해 준 허준이란 친구일세. 의술이 아주 뛰어나니 잘 살펴보도록 하게.”

당시 어의(궁중에서 임금의 진료를 맡아 보던 의사)였던 양예수는 허준에게 이것저것 한의학에 대해 물어 본 뒤 크게 감탄했습니다.

“이제부터 내의원에서 근무하도록 하라!”

허준이 남긴 우리 나라 최고의 의학서인 '동의보감'

허준은 깜짝 놀랐습니다.

과거도 보지 않은 자신에게 임금을 비롯해 왕비ㆍ왕자ㆍ공주 등 궁궐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 근무의 임무는 너무나도 뜻밖이었습니다.

허준은 그 때부터 꿈에도 그리던 내의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허준은 1575년(선조 8년)에는 명의인 안광익과 선조를 진맥할 정도로 궁중에서도 뛰어난 의술을 펼쳤습니다.

내의원에 발을 들여 놓은 지 6 년, 그의 뛰어난 의술은 조정은 물론 온 나라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 광해군을 천연두로부터 구해 그런데, 궁궐에 난리가 났습니다. 광해군이 두창(천연두)을 앓게 된 것입니다.

“내의원들은 뭣들 하는가! 이번에도 태자를 두창으로 잃어야 하겠는가?”

선조는 내의원들을 불러 놓고는 호통을 쳤습니다.

실력 있다는 내의원들이 모두 손을 놓고 있을 즈음, 허준이 자신이 조제한 약으로 두창을 다스려 보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여보게, 두창은 약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왜 모르는가?”

“어린 돼지의 꼬리 끝을 찔러 피를 낸 다음 용뇌수(녹나무)에서 뽑아 낸 약재를 팥알만큼 잘라 약을 만들겠습니다.”

당시 광해군은 열이 너무 많아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했습니다.

선조는 허준에게 모든 ?맡겼고, 얼마 후 광해군은 원기를 회복했습니다.

◎ 15년 만에 '동의보감' 완성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준은 선조의 피난길에 동행했습니다.

허준은 임금의 병을 다스릴 온갖 약재와 침을 챙겼습니다.

1596년,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한양으로 무사히 돌아오자 허준에게 종1품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허준은 벼슬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습니다.

내의원 의서가 거의 도둑맞아 남은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약한 병에도 치료할 방법이 없어 속절없이 죽어야 했습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의서를 만들라!”

선조의 명에 의해 허준 등 내의원들이 ‘동의보감’ 편찬을 시작했습니다.

허준 동상. 양천 허씨 탄생 설화가 깃든 서울시 강서구 허가바위 부근 구암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아픈 아낙네를 치료하는 인자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전쟁으로 내의원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선조의 병세도 더 악화됐습니다.

내의원들 또한 전쟁으로 인해 흩어지거나 죽었습니다.

마침내 선조 곁을 지키는 어의는 허준만 남게 됐습니다.

그러나 결국 선조는 1608년 죽고 광해군이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당시 법도에는 임금이 죽으면 어의는 귀양을 가거나 죽어야 했습니다.

신하들은 허준을 벌해야 한다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자신의 두창을 치료하고 선조 임금을 끝까지 지킨 허준을 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 유배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허준을 고향으로 유배시키시오.”

1608년 3월, 허준의 나이 일흔이었습니다. 허준은 광해군의 배려로 고향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동의보감 완성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1 년 8 개월 만에 다시 내의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에도 허준은 ‘동의보감’을 마무리하는 데 온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15 년 만에 드디어 동의보감은 완성됐습니다. 동의보감은 백성들에게 널리 읽혀졌습니다. 허준은 이후에도 죽는 날 까지 병자들을 정성스레 돌봤습니다.

1615년, 허준은 77 세의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동의보감’은 현재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김남석(작가)

■ 허준 연보

1539년 무관이었던 아버지 허론과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남
1568년 유희춘이 지은 ‘미암일기’에 처음으로 허준의 이름이 등장
1569년 유희춘의 추천으로 내의원에 들어감
1575년 어의 안광익과 함께 선조를 진맥
1590년 광해군의 두창을 약으로 치료. 그 공으로 양반 신분이 됨.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길에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모심.
1596년 선조로부터 의서 편찬의 명을 받아 의서 편수국을 세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서 편찬 중단
1601년 비상용 의서 ‘언해구급방’ 등을 펴냄
1608년 광해군이 임금이 오름. 귀양지에서 동의보감을 계속 집필.
1610년 ‘동의보감’ 25 권을 완성
1612년 나라 전체에 전염병이 퍼지자 직접 돌아다니며 환자를 치료
1615년 파주시 하동면 진동리에 묻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