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재 고려시대 왕건 '나체좌상'과
앙코르와트의 나체좌상
문화뉴스가 많지 않은 요즈음에 다가오는 6월 서울에서 전시될 북한 문화재에 대한 뉴스는 반가운 뉴스의 하나다. 앞선 글 <역사산책>에서 함경도에서 발굴된 약 4천년 전의 학의 다리 뼈로 만든 뼈피리에 대하여 논한 길에 이번에 함께 전시되는 또 하나의 특이한 북한 문화재인 왕건의 '나체좌상'에 대하여 언급해 두기로 한다.
북한 문화재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렇다할 정설들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오는 6월에 서울에서 이 '나체좌상'이 전시될 때 '고려 태조 왕건의 나체상'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이 좌상의 설명에서 나체 문제에 있어서 좀더 명확한 의미 부여가 있어야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상인 '나체좌상'은 북한판 도록에도 수록되지 않았을 만큼 아직도 여러가지 검토중에 있는 것을 보아 보다 평가가 열려 있는 상태로 보인다. 놀랍게도 아래의 사진에서 보는대로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좌상은 나체상이다. 과연 왕건의 청동상을 만들면서 처음부터 나체좌상을 만들었을까? 왕의 조각을 나체상으로 만든 것은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청동좌상은 북한에서도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과 13년전인 1993년에 발굴된 청동좌상이라는 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갑자기 전에 없는 북한 문화재 진품들이 남한에서 전시되게 되는 배경에는 지난번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뒷쪽에 방치되었던 북관대첩비를 오랫동안 힘을 들여 돌려받아 북한으로 보내 원위치에 복원토록 한 것에 대한 보답성이 포함되어 있어보인다.
북한 문화재는 보존문화가 좀더 앞서 있는 남한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면에서 북한 문화재의 남한 전시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남한에 전시되면서 더욱 우리 민족의 문화 유산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고 그 보존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면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나체좌상'이 서울에서 전시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왕건 청동 '나체좌상'을 대하면서 우선 의문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역대 왕들 가운데도 나체 조각상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동아시아에서 임금의 얼굴을 그리지도 못했던 상황에서 전라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동북아시아에서 왕건의 '나체 좌상'은 유일무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 본존불이 초기에 색칠을 했던 자국이 있으며 옷을 덧입혔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왕건의 '나체좌상'은 중앙박물관 조현종 고고부장이 "원래 청동상은 옷을 입고 있었으나 수백년간 땅에 있는 동안 옷이 부식돼 나상(裸像)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한 것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이 또한 '나체'로 만들었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추론일 수 있지만, 너무 신기해 할 것 없이 왕과 나체좌상에 대한 일반적인 경향을 살펴보면 결코 나체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건 청동상은 1993년 개성에 있는 태조 왕건릉인 현릉(顯陵)을 보수 공사하던 중에 봉분의 북쪽 5m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그 만들어진 연대는 10세기 말~11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143.5cm의 이 청동좌상은 왕건 사후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당시 고려의 수도인 개성의 봉은사 태조진전(太朝眞殿)에 안치됐었다. 말하자면 이 청동상이 불상이 아니기 때문에 고려 태조의 사당에 안치된 고려 태조의 신상인 셈이다.
이 신상이 고려가 망하면서 경기도 연천의 작은 사찰에 옮겨졌다가 조선 세종 때 현릉으로 옮겨 땅속에 파묻혔다가 1993년에 현릉을 보수하다 발굴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왕건의 사당에 안치되었다가 조선조 세종 때에 왕건의 현릉에 묻었다는 것을 볼 때 사당에 있을 때는 옷을 입혔다가 땅에 묻었을 때는 옷이 썩었거나 옷은 입히지 않은 채 청동좌상만 묻었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만에 하나 고려시대 초기에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만들 때 처음부터 '나체좌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완벽히 배제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 거의 개연성이 없는 추단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이에 대한 일단의 검토를 해보기로 하자.
세종 때에 고려 태조 현릉을 정비한 일이 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있으나 왕건의 청동상을 현릉에 묻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정확성은 아직도 불분명하게 보일 수도 있다. 로마 황제들의 나체상은 흔히 많이 알려져 있으나 동북아시아의 일본 중국의 역사에서는 왕의 나체 좌상은 찾아볼 수 없다.
*로마제국의 갈루스 황제 나체상 (Trebonianus Gallus: 251–53 A.D.)
다만 같은 동양권인 동남아시아에서 왕의 조각상으로 나체 좌상이 있긴 하다. 그러니까 왕건의 나체좌상이 나체라고 판명되더라도 동양권에서 유일한 것은 아닌 셈이다. 앙코르와트의 유적에 왕의 나체좌상이 그것인데 그 좌상을 흔히 문둥이왕(Leper King)의 좌상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 조각상이 있는 곳을 문둥이왕 테라스(Leper King's Terrace)라고 부른다.
이 좌상은 자야바르만 7세 왕의 좌상이라고 하는데, 코끼리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는 이 좌상은 현재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좌상은 사진에서 보는대로 옷을 입지 않은 나체상이며 오른쪽 무릎은 세우고 그 위에 오른손을 얹어 놓고 있다. 그러나 남성의 심벌은 조각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것을 '야마의 심판'이라 하여 '죽음의 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나체좌상인 Leper King 좌상
자야바르만 7세 왕의 좌상을 문둥이왕 좌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나환자들을 돌보는 많은 의료원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왕 자신이 나환자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문둥이 좌상을 '나체좌상'으로 보는 것은 그 좌상이 있는 주위의 조각벽에는 아프사라스(Apsaras) 나체상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나체좌상이 정확히 본래부터 나체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가 나환자였다는 것도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는 주장들이 있다.
The Leper King, thus called because he built many hospitals for lepers, and was rumored to be a leper himself. The statue of the Leper King is unique in Khmer art in that it is naked. Though I guess the half naked Apsaras on the wall supporting the statue, and everywhere else, don't count. And I wonder about the naked-ity of the statue of the Leper king: is it anatomically in-correct, or was he truly the unfortunate victim of leprosy? (http://www.phongsaly.com/Journal/Cambodia/Day1.asp)
고려 태조 왕건의 좌상 또한 '나체좌상'으로도 불릴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그 좌상이 나체였을지에 대한 판단은 아직은 많은 방증이 부족한 상황이다. 자세히 왕건 청동좌상을 들여다 보면 그 모양새는 남성상이 아니라 체형상 여성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왕관은 보살상에 가깝고 두 손을 모은 것도 어딘가 황제상이 아니라 여성적인 포즈로 보인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백화점의 쇼윈도우에 옷을 입혀 전시되는 마네킹처럼 의상을 입혔을 경우를 생각하여 그렇게 볼품없는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태조 왕건의 청동 조각상이 너무 볼품없다고만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필자의 의견이다.
왕건의 '나체좌상'이 남성의 성기가 표식이 되어 있다고는 하나 전체 좌상에 비하여 약하게 처리되어 있는 것도 주목된다. 앙코르와트의 나체좌상이 남성심벌이 없는 것은 불교의 부처상을 따라 만든 좌상의 경향이라 할지라도 왕건 '나체좌상'도 그와 같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전통 불교 사상에는 여성은 바로 부처가 될 수 없고 먼저 남성이 되고 난 뒤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현릉 북쪽 5미터 지점에서 발굴되었다는 청동좌상이 왕건이 아닌 다른 이유로 묻은 여성 청동좌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왕건 사당에 안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신상이 '나체좌상'이라고 불리기보다는 여러가지 동북아시아의 전통 문화에서 볼 때 이 청동좌상은 본래는 옷을 입힌 청동좌상이었으나 매장과 출토에서 옷을 입히지 않은 채 발굴되었다고 보아 그 이름을 왕건의 청동좌상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전시할 때는 다소의 가상적인 의상을 입힌 후에 전시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앙코르와트의 자야바르만 7세 왕의 나체좌상은 옷을 입혀두기도 한다.
더더욱 현재 사진에 보이는 왕건 청동상이 북한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앉은 모습이 의자가 전혀 보이지 않도록 푸른 천 위에 초라하게 앉혀 있는 모습이다. 사당에 전시되었던 고려 태조의 금동좌상이었다면 적어도 사당의 신상답게 모양이 있는 왕좌의 등높은 구조물의 백그라운드가 있는 용상 위에 옷을 입혀 안치한 왕건의 모습으로 전시되었으면 한다. 남한 전시를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서도 저대로의 모습으로 전시되는 것은 오히려 비웃음을 살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진을 보면 왕건의 좌상이 건물 내부의 모서리를 배경으로 안치되어 있는 것도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적어도 고려 태조의 신상이라면 그 조각상만이 아니라 안치해야 할 주변 환경도 좀더 제대로 갖춘 신전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라를 창건한 왕들은 대개 사당이나 종묘를 세워 특별히 제사를 올리기도 했는데, 고려시대에 수도인 개성의 봉은사 태조진전(太朝眞殿)에 왕건의 금 도금을 한 청동좌상을 만들어 안치해 사당을 만들었다는 것은 신라의 박혁거세가 사거한 후 신궁을 만들어 제사를 한 것과 맥락이 닿아 있다.
일본의 신궁에 영향을 준 박혁거세 신궁에도 박혁거세 초상이 안치되었을지 아니면 금동좌상이 안치되었을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이번 북한 문화재 남한 전시를 통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고려 태조의 사당에 왕건의 금도금을 한 청동좌상이 안치된 것이 맞다면 박혁거세 신궁에도 금으로 도금한 박혁거세 청동좌상이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그것도 나체상이었을까?
동양의 샤마니즘에서나 유불선의 종교적 제의에서 보아도 사당의 제단에 안치된 신상들은 12지신도에서 볼 수 있는대로 날리는듯한 신선의 옷 등의 의상을 걸친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박혁거세상은 나체상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집트의 아부 심벨의 라암세스 2세의 신상도 좌상이듯이 박혁거세 신상도 좌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03/29/06 오두방정)
(*아래는 이집트의 아부심베 신전의 라암세스 2세의 신상. 좌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나일강의 아스완 댐 건설로 본래의 위치에서 신상을 여러 조각으로 분리하여
인공으로 조성한 언덕 위로 70미터 정도 끌어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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