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자료/유적·유물·사찰

불타기전 낙산사 옜모습

사오정버섯 2007. 2. 15. 22:31

 

낙산사

 



금강산, 설악산과 함께 관동 3대 명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오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설법을 펼치며 항상 머무는 곳을 이르는 보타낙가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역대로 지위와 신분을 떠나 관음진신을 친견하려는 참배객들의 간절한 발원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낙산사는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풍광과 부처님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천수관음상 칠관음상 등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보타전, 창건주 의상대사의 유물이 봉안된 의상기념관숱한 성보문화재를 갖추고 있어 관음성지이자 천년고찰로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낙산사는 지난 2005년 4월 대형 산불로 인해 많은 당우가 소실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낙산사를 아끼고 사랑해주신 국민들과 불자님들의 성원에 힘입어 이제 새롭게 천년고찰 불사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4월28일, 공중사리탑 보존처리 과정에서 부처님 진신사리와 장엄구가 출현한 것은 전국민과 불자님들의 사랑과 기도발원 공덕이 쌓이고 쌓인 결과라 하겠습니다.
주지 금곡 정념스님을 비롯한 낙산사 사부대중은 부처님 진신사리 출현의 의미를 되새기며 천년고찰 복원불사를 향해 온 힘과 신심을 다할 것입니다.
     
     
(신라 문무왕11)
-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함
(원성왕 2) - 화재로 인하여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탐
(헌안왕2)
- 범일스님이 세 칸의 불전을 짓고 정취보살상 봉안
  10세기 중엽
- 범일스님의 중창 이후 100여 년이 지났을 때 들불이 일어났으나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불전은 피해를 입지 않음
(고려 명종27) - 유자량(庾資諒)이 관음굴에서 기도하다가 파랑새〔靑鳥〕의 영험 을 경험
  13세기 초 - 이규보(李奎報)가 관음보살상을 보수하고 복장 유물을 봉안함
(고종41) - 몽고군의 침입으로 관음상과 정취보살상,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 주를 양주성
   (襄州城)으로 옮김. 양주성마저 함락되자 두 보주를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다시
   꺼내어 감창고(監倉庫)에 간직함
(고종45) - 감창고에 있던 두 보주를 어부(御府)로 옮겨 보관함
(조선 정종1) - 태조 이성계가 행차하여 능엄법회를 개최함
(태종3) - 태종이 선공소감(繕工少監) 김계란(金桂欄)을 보내어 재이(災異) 를 없애기 위한
   도량을 개최함
(태종4) - 왕실에서 내신을 보내어 기청법회(祈晴法會)를 개최함
(세조12) - 세조대왕이 행차함
(세조13) - 세조대왕이 행차하여 헌향하고 사찰 중건을 지시함
(세조14) - 학열(學悅)스님이 중창함. 현재 경내에 남아 있는 칠층석탑, 홍 예문, 원통보전 담장 등은 이 무렵 조성된 것임
(성종2) - 선학(仙學)스님이 중수함. 이때 용선전, 영산전, 어제루, 승당 등을 보수하고 단청도 새로 입혔다고 함
(성종20) - 산불로 인하여 관음전이 불에 탐
(선조25) - 임진왜란으로 사찰 대부분의 당우가 불에 탐
(광해군11) - 관음굴을 중건함
(인조9) - 화재가 발행하여 사찰이 불에 탐. 종밀(宗密), 학조(學祖)스님 등 36인이 중창함
(인조21) - 도원(道源), 대주(大珠)스님 등 25인이 중수함
(숙종9) -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할 때 공중에서 한 개의 명주(明珠)가 내 려 왔다고 함
   석겸(釋謙)스님이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탑을 조성함
(숙종18) -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을 조성함
(숙종20) - 공중사리비(空中舍利碑)를 건립함
(숙종23) - 정수(精粹)스님이 인월암(印月庵)을 창건함
(영조13) - 석겸스님 등이 사적판(寺蹟板)을 새김
(영조28) - 덕린(德麟)스님이 홍련암을 중수함
(정조1) - 화재로 인하여 원통보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불에 탐
(정조21) - 혜민(慧旻)스님이 홍련암을 중수함
(철종5) - 경봉(鏡峰)·염진(念眞)·긍념(肯念)등의 스님이 화주가 되어 원통 보전과 용선전을
   중수함. 어실각(御室閣)을 중수함. 화봉(華峰) 스님이「낙산사원통보전어실각수보기
   (洛山寺圓通寶殿御室閣修 補記)」를 지음
(고종3) - 큰 비로 인하여 홍련암이 무너짐
(고종6) - 의연(義演)스님이 홍련암을 중건함
(고종7) - 최병복(崔秉復)이 「홍련암중건기」를 지음
(고종8) - 선학(仙鶴)스님이 빈일루(賓日樓)를 중건함
(고종30) - 선학, 인파(仁坡)등의 스님이 영산전을 중수함. 일봉(日峰)스님이
  「오봉산낙산사영산전중수불사단호기」를 지음
(고종32) - 승당이 불에 타자 선학스님이 중건함
  - 경은(敬隱)스님이 선당, 후각(後閣)등의 일부 당우를 새로 지음
  - 관음굴이 무너짐
  - 흥운(興雲)·청호(晴湖) 두 스님이 관음굴을 중건함. 보룡스님이
  「낙산사관음굴상량문」과 「낙산사관음굴중창기」를 지음
  - 일제의 ‘30본말사법’에 의해 건봉사의 말사가 됨
  해성(海星)스님이 빈일루를 중건함. 김동규(金東圭)가「낙산사빈 일루중수기
  (洛山寺賓日樓重修記)」를 지음
  - 백월(白月)스님이 「영세불망기」를 지음
  - 주지 응호(應湖)스님이 법전과 요사를 수리함
  - 주지 규현(奎鉉)스님이 도량 전체를 수리함
  - 만옹(晩翁)스님이 의상대에 정자를 새로 지음
- 만해(萬海)스님이 「의상대기(義湘臺記)」를 지음
  - 만해스님이 건봉사(乾鳳寺)의 본말사 사적을 편찬하면서 낙산사의 사적도 함께 정리함
  -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 일부가 불에 탐
  - 주지 만옹스님이 중건함
- 박한영스님이 「낙산사중건상량문」을 지음
  - 1936년의 폭풍우로 무너졌던 의상대 정자를 새로 지음
  - 박한영스님이 「낙산사의상대육각정중건기」를 지음
  - 한국전쟁 때 사찰 내 전체 당우가 불에 탐
  - 이형근 장군이 원통보전과 종각 등을 새로 지으면서 중창함. 7 층석탑도 이 때 중수
  - 원통보전 내부의 신중탱화를 조성하여 봉안함
  - 홍예문 위의 누각을 새로 지음
  - 「낙산사동종」이 보물 제479호, 「낙산사칠층석탑」이 보물 제499호로 각각 지정됨
  - 「홍예문」「낙산사담장」「낙산사」등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34·35호로 각각
   지정됨
  - 원철(圓徹)스님이 중창을 시작함
  - 「의상대」가 강원도유형문화재 제 48호로 지정됨
  - 의상대를 중건함. 홍련암을 중창하면서 내부에 탱화와 제석천 룡 탱화를 함께 조성함
  - 홍예문을 중건함
  - 주지 원철스님이 해수관음전을 짓고 동양최대 해수관세음보살 을 봉안함
  - 「양양낙산사사리탑」이 강원도유형문화재 제 75호로 지정됨
  - 주지 진철스님이 고향실.무설전.무이당을 해체 복원 중창함
  - 주지 진철스님이 양양시내에 포교당 및 유치원을 개원함
- 「낙산사홍련암」이 강원도문화재자료 제 36호로 지정됨

(6월 22일)
- 주지 혜승스님이 범종각을 짓고 범종을 주조함
- 전통사찰로 등록
  - 주지 보산스님이 일주문 건립
  - 오현, 지홍, 마근 스님이 보타전, 보타루, 해우당을 건립하고 1500불 32응신 7관음상을
   봉안함
  - 주지 마근스님이 의상대를 해체 복원함
  - 주지 마근스님이 심검당을 신축함
  - 주지 지홍스님이 근행당을 신축함
  - 주지 지홍스님이 의상기념관 다래헌을 건립함
  - 주지 지홍스님이 의상교육관을 건립하고 원통보전 기와 번와와 단청을 함
(3월)
(2월 3일)
- 주지 설웅스님이 낙산유스호텔을 인수 증.개축함
- 원통보전에 봉안된 건칠관세음보살좌상이 보물 제1362호로 지정됨
(4월5일) - 4월 5일 대형 산불로 원통보전을 비롯한 많은 당우가 소실되는 등 큰 피 해를 입음
- 주지 정념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의 노력으로 건칠관세 음보살좌상은 무사히 이운함
(4월 28일)

(5월)

(6월 24일)
(11월 13일)
- 공중사리탑을 보존처리하던 중 부처님진신사리 출현. 정념주지스 님은 같은 해 5월18일
   기자회견 열고 사리장엄구 일체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매일 친견대법회를 봉행함
- 주지 정념스님이 부처님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 주변을 정비하고, 화재피해를
   입은 7층석탑을 보존처리함. 보타전 가는 길에 해우소를 신축함
- 주지 정념스님이 홍련암 요사체 연화당(蓮華堂) 상량식을 봉행함
- 주지 정념스님이 홍련암 요사체 연화당(蓮華堂) 낙성식을 봉행함

 

 


원통보전을 나와 조계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나가다보면 일주문 못미쳐 무지개 모양의 석문(石門)인 홍예문(虹霓門)이 있다.
홍예문은 위는 누각(樓閣)이고 그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이룬다. 누각은 산불로 인해 소실되었다.

홍예문은 1467년(세조 13)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그 위의 누각은 1963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축조 방식은 먼저 문의 기단부에 걸치게 다듬은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 뒤 두 줄로 쌓아 둥근문을 만들었다. 선단석은 홍예문 등에 사용되는 맨 밑을 괴는 모난 돌을 가리킨다.
문의 좌우에는 큰 강돌로 홍예문 위까지 성벽과 같은 벽을 쌓아 사찰 경내와 밖을 구분했다. 이 홍예문에는 장방형으로 26개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에서 석재 하나씩을 내어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혹은 사용된 돌은 강현면 정암리 길가의 것을 가져다 쌓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통보전원통전(圓通殿), 혹은 관음전(觀音殿)으로도 불리며,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다.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 원통보전은 전쟁직후인 1953년, 당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관음보살의 원력으로 치유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과 군인들,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복구된 것이었다.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 따르면, 의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받은 뒤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주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開山祖)인 범일(梵日, 810∼889)스님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는데, 아마도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략으로 관음상이 훼손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고려의 명유(名儒)인 이규보 등이 새롭게 관음상의 복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원통보전 내에는 건칠관세음보살상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는데, 2003년 2월 3일 보물 제 1362호로 지정되었다. 후불탱화로 아미타극락회도가 걸렸으며 그밖에 관음상 주위로는 오른쪽에 신중탱화(1959년)와 동종(銅鐘), 사진본으로 된 의상대사 진영 등이 조성되었다.

2005년 4월 화마로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었으나, 주지 금곡 정념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의 노력으로 건칠관세음보살상은 안전한 곳으로 봉안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조선시대 석탑으로서 현재 보물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산사는 조선 세조 대 (재위,1455∼1468)에 중창되었는데 이 탑도 그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비록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탑의 상륜(相輪)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평면은 방형(方形)으로서 기단석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위에 상륜부가 마련된 구조를 하고 있다. 기단석(基壇石)은 지면에 2단의 층을 이룬 지복석(地覆石)과 그 위의 복련(伏蓮)이 조각된 지대석(地臺石)으로 구성되었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우주(隅柱)가 새겨지지 않았고, 그 위에 얹은 뚜껑돌인 갑석(甲石)은 아래 위가 수평인 하나의 돌로 된 판석(板石)인데, 그 밑에 부연(副椽)과 2단의 각형(角形) 고임이 있다. 기단 상면에는 겹잎〔複蓮〕의 복련(覆蓮) 24잎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전체적 양식은 강릉시 내곡동 403번지에 있는 보물 제87호 신복사(神福寺)터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이 탑은 한국전쟁 당시 손상되었으나 1953년 4월 이형근 장군이 낙산사를 중건할 때 함께 재건되었다. 현재 탑의 크기는 전체 높이 620㎝이다.
 

 

 

 

 

원통보전 주위에는 그 둘레를 네모 낳게 방형(方形)으로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담장인 원장(垣墻)이 있다.

축조된 시기는 세조가 절을 중건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이 원장은 법당을 둘러싼 성역(聖域) 공간임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아울러 겸비하고 있다.

사찰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 담장이며, 현재 강원도유형문화재 제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장 안쪽의 담벽은 기와로 쌓고 담장 바깥쪽은 막돌로 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담벽은 강회진흙과 평와(平瓦)를 차례로 다져 쌓아 담벽앞면에 기와로 가로 세로의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에 맞추어 둥근 화강암을 바르게 쌓고 돌과 돌 사이는 강화진흙으로 메웠다. 담장 위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고 있다.


본래 터만 남아 있었으나 근래에 전체적으로 보수하면서 연결했다. 크기는 전체 길이 220m, 높이 3.7m이다.
산불로 일부 유실되었으나 원통보전과 함께 복원될 예정이다
 

 

 

보타전은 원통보전,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요,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음도량임을 상징하는 전각으로서, 1991년 7월 짓기 시작해서 1993년 4월 10일에 완공했다. 규모는 앞면5칸, 옆면3칸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보타전 안에는 그밖에 동종금고(金鼓)가 있다. 전각 외부 벽화는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7관음상을 봉안하던 날에는 이적(異蹟)이 일어나 불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날 밤,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청학(靑鶴) 다섯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늘 거친 파도소리를 토해내던 동해 바다가 문득 조용해졌으며, 무지개와 같은 서기광명(瑞氣光明)이 온 하늘에 가득 찼다. 또한 그날 밤 신도회장은 동해 바닷물이 해일을 일으켜 보타전까지 날아 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보타전은 배산임수의 지형 덕으로 지난 2005년 대형 산불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현재 보타전 앞에는 누각 형태의 보타락이 있으며, 그 앞에는 큰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낙산사 성보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다. 그래서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동해에 왔다가 낙산사를 찾는 여행객들이면 빠짐없이 들러 참배하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코스가 되어 있을 정도다.

해수관음상은 1972년 처음 착공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했다. 크기는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며, 대좌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川王像)을 조각했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甘露水甁)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들어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해수관음상은 우리나라에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약700여 톤을 운반해와 조성한 것이다. 해수관음상 앞에는 기도처인 관음전이 있다. 

 

 

 

낙산사의 산내암자의 홍련암(紅蓮庵)은 의상대 북쪽300m 지점에 있다. 이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본절인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한 장소로서, 또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석굴 안에서 기도하던 바로 그 장소로서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에서부터 멀리 이 곳까지 온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푸른 새〔靑鳥〕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이윽고 7일 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 곧 홍련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의상대사는 드디어 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푸른 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觀音窟)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또다른 창건설화로서는,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리에 대나무가 솟았는데, 그 곳에 불전(佛殿)을 지으니 곧 홍련암이라고도 전한다.

두 이야기 전부 의상대사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려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내용에서는 일치하며, 부분적으로 파랑새·대나무·석굴 등이 첨가된 것이므로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홍련암의 연혁은 주로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거해 살펴볼 수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619년(광해군 11)에 중건되었고, 1752년(영조 28)에 덕린(德麟)스님이 중수했다. 이어서 1797년(정조 21)에 혜민(惠旻)스님 중건, 그리고 1869년(고종 6)에 의연(義演)스님이 중건했으며 1911년에 흥운(興雲)·청호(晴湖) 두 스님이 중수했다고 한다.
1869년의 중건은 1866년의 홍수로 무너졌기 때문이며, 1911년의 중수는 1908년(융희 2)에 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연혁이 비교적 짧고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연혁이 거의 전하지 않는 점이 아쉽지만,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나마 그런대로 낙산사와 더불어 꾸준히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가 있다.

전각이나 불상·불화등에서 오래된 것은 없으나 홍련암 전체가 현재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에는 동암 도봉(東庵道峰)스님이 1962년에 중건한 봉향각(奉香閣)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관음전 등은 1975년의 중창 때 지어졌으며, 안에 봉안된 탱화 역시 같은 해에 조성되었다.

관음전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서 바닷가 암석굴(巖石窟)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전각은 법당 가운데쯤에 조그맣게 마루를 뚫어 놓아 그곳으로 출렁이는 바닷물을 실감나게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이하다. 절 근처 바닷가에는 보기 드문 석간수(石澗水)가 있는데, 이 샘은 원효스님이 양양에 있는 영혈사(靈穴寺) 샘물을 석장(錫杖)에 담아 끌어 왔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 샘물은 지금은 보타전 앞으로 옮겨져 있다.

 

 

 
 

산불로 소실되기 전 고향당 옆 종각에 보존되어있던 종으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었다.

조선시대인 1469년(예종 1)에 낙산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세조를 위해 그의 아들인 예종이 만들게 한 범종이다.

범종의 양식을 보면, 종신(鍾身)은 중앙에 세 줄로 된 굵은 띠를 옆으로 돌려서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했다. 보통의 범종에서는 띠 윗부분에 놓이는 유곽(乳廓)과 유두(乳頭)가 생략된 것이 특색이며, 그 자리에 보살상 4체를 양각했고, 그 사이에 범자(梵字) 네 글자씩을 역시 양각으로 배치했다.

보살상은 두광을 갖춘 채 연화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두광·보관(寶冠)·천의(天衣) 등의 표현이 모두 유려한 솜씨로 되어있다. 보살상 위와 종뉴 바로 아래에 있는 어깨띠〔肩部〕부분에는 또다시 범자 열여섯 자를 양각으로 돌아가며 배치했으며, 이 범자 위로 연잎 서른여섯 잎을 새겨 넣었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범종 가운데 16세기 이전에 조성된 드문 예 가운데 하나로서, 당대의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크기는 전체 높이 158㎝, 입지름 98㎝이다. 동종은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봉안될 예정이다
 

공중사리탑은 현재 강원도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중사리탑은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으로서, 조선시대 중기인 1692년(숙종 18)에 석겸스님 등이 대원을 발하여 세웠다고 전한다.
탑의 양식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구조는 지대석 및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구성된 기단부, 탑신과 옥개석의 탑신부, 그리고 탑신부 위에 놓인 상륜부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먼저 지반위에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팔각으로 구성된 기단을 얹었다. 하대석은 팔각으로서 옆면에 안상을 마련하고 그 안에 태극무늬를 새겼으며, 그 윗부분에다 16잎의 복련을 조각했다. 중대석은 각 면을 아래 위로 연결된 연주문으로 구획했으며, 그 안에 무늬가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밑부분을 양련으로 장식하고 그 위의 옆면에 안상을 새겼다. 안상 안에는 범자를 음각으로 새겨넣었다.

탑신은 둥근 구형인 것이 특색이며, 그 위에 올려진 옥개석은 팔각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의 처마는 길이가 짧으며 끝에서 살짝 위로 솟아 반전되었는데, 낙수면에 기와골은 표현되지 않았다.
상륜부는 양련·복발·보륜·보주를 각각 따로 만들지 않고 한 돌에 큼직하게 조각했다.


공중사리탑을 조성한 인연은 1683년에 홍련암에서 개금불사를 거행할 때 문득 방안이 서기로 가득차더니 공중에서 영롱한 구슬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고 한다. 스님들이 그것을 들어보니 유리처럼 광채를 내었다.
스님들이 기뻐 말하기를 “이 같은 상서로움이 옛날에도 두 번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세 번째니 얼마나 반가운가.”라고 말했다. 이에 석겸스님 등이 이 탑을 쌓고 그 구술을 봉안했는데 그 공사가 무려 9년이나 걸렸다. 그리고는 탑이 완성된 이듬해 수춘거사라는 문사를 초빙하여 그 유래를 탑비에 적었는데, 이 탑비는 현재 홍련암 옆에 있다.

한편 이 공중사리탑이 자리한 곳은 풍수에서 말하는 이른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서 길지라고 전한다.
 

보타전 내부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성관음(聖觀音)·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준제관음(准堤觀音)·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상과 32응신상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신앙의 성지답게 그야말로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셈이다.
이렇듯 많은 관음상을 조성한 것은 우리 민족의 구제와 해탈을 기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1500관음상 한 분 한 분의 천수천안과 32응신상을 곱하면 그 수가 5천만 정도인데, 그것은 곧 5천만 우리 민족의 인구수와 일치한다. 곧 우리 5천만 민족의 구원과 해탈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관음상의 재질은 모두 목조로서 백두산에서 자라는 홍송(紅松)을 사용했다.
보타전 안에는 그밖에 동종과 금고(金鼓)가 있다. 전각 외부 벽화는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7관음상을 봉안하던 날에는 이적(異蹟)이 일어나 불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날 밤,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청학(靑鶴) 다섯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늘 거친 파도소리를 토해내던 동해 바다가 문득 조용해졌으며, 무지개와 같은 서기광명(瑞氣光明)이 온 하늘에 가득 찼다. 또한 그날 밤 신도회장은 동해 바닷물이 해일을 일으켜 보타전까지 날아 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의상대(義湘臺)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고 전한다.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체조스님의 활동 년대가 18세기이므로 위의 시를 통하여 적어도 이때까지는 의상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근대 이전에 폐허가 되었던 듯하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25년에 낙산사 주지 김만옹(金晩翁)스님이 이곳에 정자를 새로 지었다.

정자를 지을 당시가 6월인데, 들보로 쓸 굵은 나무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졌고, 스님은 그 소나무로 들보를 만들어 육각형의 정자를 완성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곳을 의상대로 불러 왔으나 이 때 정식으로 의상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1974년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1975년에도 한 차례 중건되었다.
근래는 1994년 11월 강원도에서 의상대를 점검한 결과 기둥·기와 등 구조체가 10도 가량 기울었고, 기둥이 썩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어 해체되었다가 1995년 8월에 육각정(六角亭)으로 복원되었다.
이곳은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이었으며, 지금도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 보는 곳이 되었다.


불에타서 안타갑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