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현리 적석총 [銀峴里積石塚]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돌무지무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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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웅촌에서 5km 지점인 새검단마을 오른쪽 서리마을 뒷산에 있다.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대부분 붕괴되어 확실한 구조를 알 수 없다. |
울산이라는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때는 조선 태종 때 서기 1413년이라고 한다. 웅촌면과 웅상면을 아우르고 있는 울주란 이름도 고려 현종 9년, 서기 1014년부터 사용하였고, 그 이전에는 울산을 공화(恭化), 흥례(興禮), 하곡(河谷), 굴아화(屈阿火)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적석총은 대부분 고구려 무덤에서 볼 수 있는데, 이곳에 적석총이 있는 걸 보면 우시산국의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이 무덤의 주인도 고구려인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경남 산청에 있는 가야시대 마지막 왕의 무덤도 돌무덤이지 않습니까. 구형왕릉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돌무덤의 주인은 대체 누구일까. 혹시 우시산국을 세운 지배계층은 고구려인이 아니라 가야인은 아니었을까. 섣부른 추정은 금물이다. 선무당이 멀쩡한 사람을 잡는다는 우리네 속담도 있지 아니한가.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이 돌무덤의 주인은 남쪽으로 내려온 고구려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 승격과 더불어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이 돌무덤은 무덤 지름이 20m, 높이가 6~7m에 이를 정도로 몹시 크다. 일종의 피라밋 형태를 띤 이 적석총은 언뜻 바라보면 구형왕릉과 비슷하다.
만약 원형 그대로 있었더라면 구형왕릉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무덤 일부가 무너져 정확한 구조는 잘 알 수 없다. 근데 이 마을주민들은 이 돌무덤 아래 있는 자그마한 저수지를 쌓을 때 이 돌을 사용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마을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마을사람들 말마따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돌무덤이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아니, 실제로 이 마을사람들의 말이 맞는 것인지도 잘 모른다. 내 어릴 때까지만 해도 규모는 이 돌무덤보다 훨씬 작았지만 이런 형태의 돌무덤은 내 고향 곳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으니까.
누군가 이 돌무덤을 발굴을 해보지 않는 한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돌무덤의 형태로 보아 서울 송파구에 있는 백제시대 무덤인 석촌동 3호분과 석촌동 4호분처럼 네모꼴로 기단을 마련, 그 위에 돌을 쌓아올렸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돌무덤 아래에는 누군가 낚시를 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조그만 산장호수 하나가 흙탕물을 출렁이고 있다. 아마도 며칠 전 쏟아진 장맛비에 씻겨 내려온 황토 때문이리라. 저 호수도 자연적으로 생겨난 호수가 아니다. 이 지역 주민들이 가뭄 때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이 돌무덤의 돌을 사용해 만든 인공저수지다.
저수지 못둑에는 흑염소 서너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우리 일행이 다가서자 흑염소 몇 마리가 놀란 듯 못둑 아래로 달아난다. 그 중 고삐가 매인 흑염소 한 마리가 우리 일행과 돌무덤을 번갈아 바라보며 '메에에~' 하고 운다. 마치 저 돌무덤 주인의 영혼을 불러내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이.
글 : [오마이뉴스 이종찬 기자]님의글입니다
사진은 사오정이 찍은사진으로 바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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