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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사오정버섯 2007. 2. 16. 17:00

이순신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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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외쪽 겨드랑이에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으며 전
사 당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
으며 그의 조카가 북을 치며 나머지 전투를 지휘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는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선무 일등공신을 수여하고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렸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진실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
지가 허구일까?
이순신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테리에 싸여 있다.
 그는 과연 전사했는가? 아니면 전사하지 않고 은둔했는가?
그의 죽음에 관한 미스테리를 밝혀보고 한 인간으로써의 이순
신의 고뇌와 갈등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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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배경

이순신 군대는 해전에서 불패를 자랑하는 무적의 군대였다.
그의 이름은 일본은 물론 명나라까지 알려져 그의 신출귀몰한
작전에 모두가 경탄을 자아내는 임진왜란의 영웅이었던 것이
다.
외국에서도 이 정도인데 국내에서의 그에 대한 존경심과 명성
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와 조선의 조정은 임란 당시 효과적 대응을 제대
로 못해 국가 위기의 파국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
운 상황이었다.
 임란이 종결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선조나 조정 대신들에 대
한 비난의 화살이 돌아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임란 당시 도망치기에 바빴던 우리의 집권자들과는 달리 의병
장을 중심으로한 의병들은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했으며 이
미 중앙 조정의 통제를 벋어나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시점
이었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조헌, 고경명, 곽재우, 김덕령 등
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의 새로운 의식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무능한 조정보다는 이들 의병장에 새로운 기대 심리
가 발생하고 있었다.

의병장들과 조선의 백성들은 전쟁 과정 중에도 외부의 적 이
외에도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잠식할 가능성이 있는 내부의 적
에 대해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던 권력의 예민한 촉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내부의 적을 찾아내 완전 제거하지 않고서는 당시의
집권층은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의병장을 중심으로 동태를
파악하다가 첫칼을 빼들었으니 그가 바로 김덕령 장군이다.
그는 무고하게 끌려가 역모 혐의를 뒤집어쓰고 31살 한창 나
이에 자신이 충성을 바친 조국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민서(李敏敍)의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기록
을 보면 "김덕령 장군이 죽고부터는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
스로 의혹하고 또 스스로 제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저 곽
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으
며 호남과 영동 등지에서는 부자와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
라고 서로들 경계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전쟁 후기에 의병장들은 몸을 사리기 시작하는데 백
성들의 신망이 두터워지자 이를 경계한 조정의 비정한 칼이
자신들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죽자 곽재우는 은둔해버리고, 권율은 아침
저녁으로 한양에 장계를 뛰워 충성을 맹세했고, 대장군 이일
은 아예 왕실과 조정의 수호자임을 자처하고 나서자 이 시점
에서 조정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이 하나 남았는데 그는 바
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당시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이러한 상황을 놓고 고
뇌에 고뇌를 거듭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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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죄를 뒤집어

쓰고, 전쟁이 끝나면 내노라 하는 장수들을 대대적으로 숙청
할 것인데 그 일호는 자신일 것임을 알고 있고, 불패의 신화
를 부담스러워하는 조정에서 전쟁 영웅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
할 만큼 커지는 것을 좌시 하지 않을텐데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있다면 기필코 이순신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정치
적 상황이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전쟁이 끝났음에도 전쟁 영웅인 이순신이 죽지 않는다면
 선조는 기필코 이순신을 잡아다가 역적으로 몰아서 죽였을
것이다.
 선조 입장에서는 커질 대로 커진 의병장과 이순신을 제거하
지 않고서는 그의 정권을 유지할 수 없으며, 민심을 안정 시
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역모사건을 조작하여 장수들을
죽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텐데 그 방법으로는 왜군을
힘껏치지 않았다든지, 월권행위를 했다든지, 명령 불이행을
죄목으로 삼아서 이순신 휘하의 모든 장수들을 엮어서 죽이는
방법이 확실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쟁영웅들을 숙청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은 명약관화한데 이순신 입장에선 전쟁에 이겨도 죽고,
전쟁에 져도 죽고, 살아남아도 죽을 이런 상황에서 그의 인간
적인 고뇌는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택일
까?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를 하고 조정의 우환을 스스로 없애줄
 것인가?
 아예 왜구를 물리친 연 후 그 여세를 몰아 중앙정부를 공격
해서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새울 것인가?
 죽기는 너무 억울하니 살아도 죽을 목숨이라면 죽음을 가장
하고 어디로 은둔해서 여생을 보낼까?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그의 머리 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기로에서도 권력 투쟁에 골몰하
는 조정에 대한 역겨움과 조국을 걱정하는 가슴어린 고뇌가
섞인 마지막날을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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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선택가능한 방법

그러면 이순신 입장에서 선택가능한 방법을 제시하고 그 실현
가능성을 살펴보자.

1) 전투중 전사

이것이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전투 중에 불
굴의 의지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다가 적의 흉탄에 맞아 장
렬히 전사하였다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익히 아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리 간단하지가 않
다.
그의 전사에는 숱한 의문이 남아있다.

의문점①

당시 현장에 맏아들 회, 조카 완 등 친족외에는 그의 죽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통상적으로 지휘선에는 많은
장교들이 같이 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면서 작전권을 조카 완
에게 이양하고 전사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본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의문점②

맏아들과 조카가 이순신이 죽고 난 후 함대를 지휘하였다고
 하나 해전은 전쟁 놀이가 아닌것이다.
 전투 지휘 경험이 전무한 이들이 조명 연합 함대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전에서는 지휘관의 깃발에 따라 일사분란한 함대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포격이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함대를 지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는 각 함선이 독자적 전투 수
행을 했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이순신이 믿고 맡길 있는 측
근 장교가 지휘했었을 것이다.
 이가 바로 이순신의 핵심 측근으로 그 이후의 모든 일을 처
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만 외부에 알려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그는 현장에 없
는 것으로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래서 당시 현장에는 아들과 조카만 있게 놔뒀을 것이다.

의문점③

노량 해전에서 왜군의 전사자는 수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전사자는 소수에 불과한데 전사한 사람
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참으로 놀랍다.
 전사자 중에는 이순신, 조방장 이영남, 돌격당 이언량 등 조
선 수군에서 가장 뛰어난 임진왜란의 영웅들이 고스란히 포함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숱한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며 죽음을 불사한 싸움에서도 불
사신처럼 살아온 영웅들이 전사자 모두 포함되어있다는 것이
다. 이들은 정말 모두 전사했을까?
그 전쟁의 영웅들이 같은 전투에서 모두......

이상에서 보건데 전사설은 의문이 많이 남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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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무장봉기

그러면 이순신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인 무
장봉기를 살펴보자.
 이순신은 무기력한 조선왕조가 백성을 내팽겨치고 도망치기
바쁜데 반해 남도 백성의 수호자로써 실질적 자치권을 발휘해
왔다.

이순신이 있는 곳은 전란의 참화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거점이며 식량과 농토가 보존되었고, 가렴주구가 없었다.
이미 민심은 남도 백성의 실질적 주인은 이순신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고 백성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대상이며, 나라를
이꼴로 만든 장본인에 대한 증오가 뿌리깊은 상황에서 만일
함대를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한양을 공략한다면 승산도 있었
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 군대는 해상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지지와 전쟁 수행 과정 중 축적된 군사적 노하우와
막대한 군사력, 식량, 일본군의 침략을 구해준 구세주라는 백
성들의 인식은 마치 고려말 이성계의 전례에서 보듯이 중앙정
부를 전복할 수 있는 세력으로 이미 성장하고 있었다.
거기다다 정도전과 같은 이론적 바탕을 보유한 학자와 결합했
을 시는 이성계의 조선 수립에서 보듯이 충분히 중앙권력을
대체할 수 있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혁명아로 불리는 허균과의 조우 가능성도 조심
스럽게 예측할 수도 있다.
왕실과 조정의 신하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당파 싸움을 일삼고
백성들을 착취하고 상황에 대한 설파와, 뿌리 깊은 모순을 해
결하자면 근본적인 해결 방책을 찾아야 하는데,
그 것은 혁명으로 새로운 피를 공급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는 허균의 설득이 있고, 이론적 기반을 제시해
줄 수 있다면,
 정도전 이성계 커플 외에 또다시 역사상 위대한 커플인 허균
이순신 커플이 탄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군은 수군 위주라서 육전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
고 왕실과 조정이 내륙으로 몽진하고 장기전을 펼 가능성도
대비해야하고, 남도 백성 외에 여타 지역의 민심을 확실히 알
기는 어려운 난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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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은둔설

인간이라면 죽고싶지 않은게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뭔가 죽지 않고 살아날
방책을 강구하는게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되 죽지않고 살아나서 여생을 보낸다면 그것은
최상의 방책이 되지 않을까?

이순신처럼 치밀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일을 은밀히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즉 전사를 가장하고 살아남아 은둔하는 것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죽음을 가장함으로써 선조와 조정의 우환거리를 제거할 수
있으면서 본인은 여생을 조용히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그 정도의 준비는 이순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그가 한 말이나 행적을 보더라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순신의 부하이며 후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유형(柳珩)의 기록
을 보면 이순신이 평소에 마음 속을 토로하기를 "옛부터 만약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해 인정을 받아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대게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날에 죽음으로써 유감이 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1711년에 이여(李 )가 쓴 정탁의 구명 상소문의 기록을 살펴
보아도 "공로가 클수록 용납되기 어려움을 스스로 느끼고 마
침내 싸움에 이르러 자기 몸을 버렸으니 이순신의 죽음은 미
리부터 계획한 것이었다고들 말하는데 그때의 경우와 처지로
 보면 그말에 혹시 타당한 점도 있다 하련가! 아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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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쟁이 끝아면 초야에 묻혀서 조용히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지녔음도 나타나는데 "말을 화양(華陽)으로 풀어보내
는 날이 오면(전쟁이 끝나면)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등의 단서가 조금씩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 이순신으로 돌아갔을 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은둔이 가장 최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다.
즉 마지막 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위장하며 측근인사들
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가족들을 구하고 자신을 따르던 충직한 부하들이
욕되게 죽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자신도 살 수 있기 때문이
다.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로써는 장례날짜와 이장의 의문이 있는
데 전사 후 기록을 보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
하고, 영구는 고금도로 이동해서, 12월 10일경 아산으로 옮겨
져서, 장례는 다음해 2월 11일에 치러진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후 1614년 묘지를 이장하는데, 그해가
이순신이 살아있었다면 70세가 되는 해이다.
 아마도 그가 살아서 은둔했다면 그때까지 살다가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결론

이순신이라면 과연 노량해전을 앞둔 전날 기나긴 고민을 하면
서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전투중 전사하는가.
 왜군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진격할 것인가.
 아니면 치밀한 준비 끝에 죽음을 가장하고 어디론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은둔해버릴 것인가.
 해답나지 않는 고민을 하면서 살아온 어느 순간 보다 긴 밤
을 지새웠으리라.

한 인간으로써, 그리고 구국의 영웅으로써, 종전 후 제거 1순
위의 정적으로써, 만백성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지도자
로써의 이순신은 과연 어떤 행동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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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그의 시 한 편으로 이 글을 맺자.

진중음(陳中吟) 2
   
삼백년 누려 온 우리 나라가
  
하루 저녁 급해질 줄 어찌 아리오.
   
배에 올라 돛대 치며 맹세하던 날
   
칼 뽑아 천산 위에 우뚝 섰네.
   
놈들의 운명이 어찌 오래랴
   
적군의 정세도 짐작하거니
   
슬프다 시 귀절을 읊어 보는 것
   
글을 즐겨 하는 것은 아닌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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