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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은 원래부터 없었다

사오정버섯 2007. 2. 16. 17:53
고려장은 원래부터 없었다
 
경북 영양군 산성에 있는 고려장(高麗葬) 터라는데

 

                    (이제부터 진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밑에 설명 참조)


 

 


    ♡ 고려장 이야기 ♡
    옛날 고려때에는 남자나 여자나 일흔살(70)에 고려장을 하였다 이섬에 효성이 지국한 아들을 둔 일흔살이 되는 할머니가 있어서 고려장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살아있는 어머니를 산에 지고가서 묻을 수가 없었다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고려장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산에 가보니 높은 곳에 넓고 편편한 좋은 반석이 있었다 어머니를 이 반석에 고려장 하기로 하였다 어머니 ! 오늘은 어머니을 업고 놀러 갑니다"어디를" 저 산에 좋은 반석이 있습니다 "그래" 아들은 어머니에게 거짓말로 놀러 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벌써 아들의 뜻을 알았고 아들이 할수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알았다 "어머니 업히시오" 오냐 ! 아들도 어머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마는 서로 속내 말은 아니하고 업고 업혀 갔다 길은 매우 멀었고 몇번씩 쉬고 쉬면서 가는데 어머니가 생각해 보니 먼길을 업고 가느라고 고될 뿐 아니라 밑만 보고 걷다가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못 찾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쉴때마다 나뭇가지를 꺽어 놓았다 아들은 어머니가 나뭇가지를 꺽는 이유를 몰랐다 아마 무심히 꺽으시려니 생각하였다 그럭저럭 목적지인 반석에 도착했다 "어머니 여기요" "자리가 참 좋구나" 어머니는 슬프기만 했다 그러나 아들의 섭섭해 하는 마음을 아는지라 말로 나타내지 않았다 "오늘 잘 먹업시다" 그러자 "너도 많이 먹어라" "예 먹습니다 어머니" "기운이 빠졌지 업고 오느라고" "괜찮습니다" "올해는 농사가 잘 되어야 할 텐데" "잘 될 겁니다 비가 잘 오니까요" 고려장 하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들이 잘 살기를 걱정해 주시는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쓰리겠느냐 생각하니 아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아들은 하는 수 없어서 거짓말로 어머니 ! 여기 계십시오 집에 가서 저녁밥을 가져 오리다 하고 갈려고 하자 어머니는 아들이 산에 자기를 버리고 가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얘야 길을 찾겠느냐 길을 모르겠거든
    나뭇가지 꺾인 것을 보고 따라 가거라 내가 올 때 가끔 나뭇 가지를 꺾어 놓았다 이 말을 들으니 아들의 가슴은 더욱 더 찢어질 것 같았다 집으로 오는 발걸음은 허둥지둥 갈피를 못 잡았다 "왜 일흔살이 되면 고려장을 해야 하나 원수 같은 일이로다" 하고 한탄을 하면서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가 살림 걱정이며 길을 잃을까 걱정하며 나뭇가지를 꺾어 두었더라는 얘기를 아내에게 했더니 아내도 울면서 "여보, 법이 다 뭐요 어서 어머니를 모셔 옵시다" "정말이오 ?" "정말이지요" "법인데 ?" "그 법에 따라 우리가 벌을 받으면 되는거 아닙니까" 아들은 아내 보기가 부끄러웠다 "당신은 마음이 참 착하오" "어서 가보시오 어머니가 추우실테니 밤에라도 가서 업고 옵시다" "그럽시다"아들은 등불을 켜 들고 그 반석이 있는 곳을 찾아 갔다 반석 가까이 가니까 무슨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는 불도 꺼지고 없었다 "이상하다" 무서운 기운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용왕님께 비나이다 우리아들 풍년들어 바리바리 실어다가 노적봉 쌓아 두고두고 먹고남고 쓰고남고 오래오래 길이길이 부귀영화 누리도록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아들 잘 되기를 빌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 !" 하고 앞에 꿇어 앉으니 아들내외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온 산이 울음 바다가 되었다 일흔이 넘었는데 고려장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온 일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러자 이 이야기가 임금님게 알려져서 아들이 임금 앞에 불려가게 되었다 "너에게 일흔 노모가 있다면서 ?" "예, 그렇습니다" "고려장을 했느냐 ?" "못 했습니다" "국법을 어긴 까닭은 ?" "예, 황송하오나 이러이러 하옵니다" 임금앞에 꿇어 앉은 아들이 전,후 이야기를 하자 임금님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고려장하려고 업고가는 줄을 알면서도 아들이 길을 잃을까봐 나뭇가지를 꺾었단 말이지 ? "예, 그러하오니 그 사랑에 감읍하여 다시 집으로 어머님을 업고 왔나이다" "알겠다 효성이 지극하구나" 임금님은 그 아들에게 양식과 베를 한 짐씩 상으로 주어 칭찬하고 그 때부터 법을 고쳐서 "나이 일흔이 되더라도 고려장하는 것을 아니하여도 좋으니라" 하고 어명을 내렸다 한다.
     
    그러나?????????????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위의 글이 감동스럽다고 감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인지 밝힙니다. 고려장(高麗葬)이란 말은 배불승유의 조선조에 고려조를 깎아내리려는 취지로 악의적으로 만들어졌고 구전되어왔습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식민사관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한국의 야만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였습니다. 효심을 자극하기 위하여 교과서에 올렸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인은 야만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해방되고 나서도 몇 십 년간 버젓이 교과서에 올려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런 글에 익숙하여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역사적 사실인양 버젓이 교과서에 실었던 무식한 일제 역사학자들은 이제 이 땅에서 참회해야 합니다. 이병도는 죽기 전에 참회하였습니다. (물론 위의 사진도 가짜입니다!) 우리 선조, 조상들은 부모에 대하여 절대로 야만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고 나라 차원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역사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노인 방치, 무관심, 학대, 몰래 버림 등 현대에 고려장이 유행되고 있습니다. 집에서 모시기 힘들면 나라에 마껴야 합니다. 노인복지시설 이용이 노인이나 가족에게 편한 시대가 왔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고려장이란 풍습이 있어서 부모가 늙고 병들면 자식들이 지게에 엎고 갖다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고려장이라는 풍습이다. 우리나라처럼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풍습인가? 과연 고려 시대에 이 고려장이 있었던가? 해답부터 얘기하자면 철저히 꾸며진 이야기이다. 그것도 일제에 의해서 날조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고려장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옛날 자료 그 어디에도 없다. 순장이나 후장처럼 가축이나 노예들을 부장품과 함께 묻는 제도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부모를 산에 갖다 버렸다는 내용은 없다. 고려시대까지 병자를 산속 깊이 내다 버리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병자란 전염병 환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효죄를 반역죄와 더불어 매우 엄하게 처벌하였다. 이런 사회에서 고려장이란 풍속이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면 고려장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고려장이란 말은 일제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조차도 사악하기 그지없다. 고려장이란 용어를 만든 이유란 즉 우리나라 문화재를 도굴하고자 만들어낸 용어라는 것이다. 전국을 뒤져 문화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은 닥치는 대로 일본으로 반출하더니 급기야는 무덤의 부장품까지 노리게 되었다. 일본인이 조선인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기가 힘들었다. 조선인 인부들은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을 꺼려했는데 이는 한민족의 정서상 당연한 것이었다. 어찌 남의 무덤을 파헤친단 말인가? 예전부터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오페르트 도굴 사건 등에서도 보듯이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것은 가장 죄질이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본인은 조선인의 경로효친 정신을 이용해 고려장이란 말을 만들어 냈는데 "조선에는 고려시대부터 고려장이란 게 있었다. 부모를 산 채로 내다 버리는 못된 풍습이니 여기 묻힌 사람은 자기 부모를 생으로 고려장시킨 놈이므로 이 무덤은 파헤쳐도 괜찮다." 라는 논거로 조선인 인부를 회유하여 무덤을 파헤치게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한민족은 충효를 으뜸으로 삼고 충효의 실천을 평생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자신의 친부모를 산채로 버리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정신이 일제의 얄팍한 상술에 이용되어 고려장이란 용어를 만들어 내게되고 이런 용어가 버젓이 교과서에 실리는 우를 우리는 범하게 된 것이다. 하루 빨리 고쳐야할 대복이다 사단법인 한배달에서 우리역사를 눈으로보는 시간을 많이도 가졌는데 그곳에 하나가 고려장이라고 주장하는 장소를 간적이있었다 지금 어느지역이였는지 기억이없지만 마을에서 2km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에는 지석묘가 있었고 어느누가 보더라도 고려장이라는 형태는 남아있지않고 조작된 흔적임을 느끼면서 일제의 만행을 개탄한적이 있다 남한에 한곳밖에 없다고 했다던 그곳 난 산중 수련하는 사람이나 산을 지키는 사람들이 귀거하는 모습으로 비쳐졌고 처음부터 우린 역사를 식민사관에 빌붙어 살아온 어용 학자로부터 씌여진 역사책을 보고 배웠으니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시험을 풀수밖에 없었다 이제라도 우리의 본 모습을 찾아서 깨끗하게 정리해야 할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