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자료/역사·희귀 자료방

거북선에 대한 자세한 이해와 해석

사오정버섯 2007. 2. 16. 16:56
거북선에 대한 자세한 이해와 해석


거북선은 어떤 기적같은 것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화도 아니며,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의 하나이던 판옥선을 개조한 전함으로 판옥선과는 형제지간과 같은 배이다. 거북선은 순수한 우리고유의 조선방식에 의해 건조된 국산전함이다. 거북선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일제시대때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공적을 격하시키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러나 그 기술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외국에서는 넬슨장군에 비교해서 뛰어남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지금부터 약 400년전 충무공에 의해 탄생한 거북선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큰 자랑거리로 알고 있으며 외국인들도 격찬하는 전함 이다. 그러나 유명한 이 배는 또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1. 주로 우리 거북선에 대한 옛날 방식의 기록 습관과 이를 잘못 이해 한 외국인에 의해 시작된 초기 연구 때문이기도 하다.

2. 일제가 일부러 거북선이나 조선 해군을 폄하하려 한 때문이다.
특히, 많은 외국인들이나 일본의 경우 우리 군선이 별볼일 없으나 어떤 기적 같은 것에 의해 거북선이 임진란 동안 잠시 쓰였다고 평가 하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오해인 것이다.


거북선은 많은 숫자가 만들어 지지 않았는데 이는 임진란 이후 거북선을 오직 함대의 선봉이 되는 돌격선으로 사용 했기 때문이다.

1. 임진왜란 당시에는 3척
2. 영조때에는 14척이 배치되었다.
3. 영조이후 점차 각 수영 뿐만 아니라 모든 전초에 배치하기 시작하 여 정조 6년에는 40척에 달하는 거북선이 취역하고 있었다.

거북선은 갑자기 만들어진 배가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축적된 기술에 의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신라- 조선기술, 고려- 검선(劍船)화포기술,
조선초-판옥선(板屋船) 조선기술 및 수군의 역사(상세설명)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수군(水軍)은 오랜 역사를 거쳐 발전되어 옴.

서기 372년 경에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등 3국이 다투어 해상무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음.
- 9세기 중엽에는 신라의 장보고(張保皐) 장군이 중국(中國)의 신라방(新羅坊)을 중심으로 대규모 교역을 하고 있었고, 동남아 지역의 해적을 소탕함.

- 고려 조(1011년)에는 배 양측에 창을 꽂아 적의 접근을 막는 검선(劍船)이 출현하였고, 1150년에는 화약(火藥)과 화포(火砲)로 전투 장비를 갖춘 전선(戰船)이 사용됨.

- 1377년에는 최무선(崔茂宣)이 대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화통도감을 만들어 18종의 화포류를 생산하였고, 1383년에는 화살 끝에 화약을 단 불화살(火箭)을 만들어 배를 불살라 침몰시키는 전술이 완성됨.
- 조선 조(1555년)에는 전투중에 노군(櫓軍)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판으로 배를 덮은 판옥선(板屋船)이 새로운 군선(軍船)으로 개발되었음.

- 우리나라는 조선기술이 발달하였고, 화포와 불화살을 이용한 화공전술(火攻戰術)이 확립되었으며 철편(鐵片)을 붙임으로써 배의 구조를 튼튼하게 만들고 상대방과 충돌하여 침몰시키는 돌격전술(突擊戰術)이 보편화되었음.

○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직전 선조 24년(1591년) 정읍현감 이순신은 전라좌수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조선기술을 가진 나대용을 만나 거북선을 만들 것을 결심 선소(현 여수시 시전동 708번지 일대)에서 거북선 제작에 착수 이듬해인 1592년 3월 27일 시전리 앞바다에서 시운전(진수식)을 하였다.

○ 1592. 2.08(선조 25년) : 돛으로 쓸 범포를 받음

○ 1592. 3.27(선조 25년) : 거북선을 타고 포격연습

○ 1592. 4.11(선조 25년) : 돛을 만듦

○ 1592. 4.12(선조 25년) : 지자포와 현자포를 시험 발사

○ 임진왜란때 거북선이 처음 등장 : 사천포해전

○ 두께가 12cm이상의 튼튼한 소나무로 만듦

○ 거북선에 사용된 소나무의 비중(比重)은 0.73

- 당시 배의 건조에 사용된 다른 목재(0.41~0.47)
보다 강도 높음

○ 바닷물 속에서 녹이 슬지 않는 나무못을 사용
충격에 강한 구조


※ 이같은 장점때문에 거북선은 좌충우돌하며 상대방의 전함과 부딪혀 침몰시키는 저돌적(猪突的)인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음

○ 주요 길이
- 배밑은 10쪽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
- 머리쪽(이물) 너비는 12자,
- 허리(한판)의 너비는 14자 5치,
- 꼬리쪽(고물) 너비는 10자 6치.
- 좌우 삼판은 각각 7폭을 이어 묶어 올림,높이는 7자 5치
- 맨 아래 첫째 판(부자리)의 길이는 68자이고,
-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째 판의 길이는 113자가 됨, 두께는 다같이 4치이다.
- 이물 비우는 가로다지로 4쪽,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 좌우에는 현자 대표 구멍을 각 각 1개식 뚫었다.
- 고물비우는 가로다지로 7장,높이는 7자 5치
- 위쪽 너비는 14자 5치, 아래쪽 너비는 10자 6치이다.
- 여섯째 판 한가운데에 직경 1자 2치가 되는 구멍을 뚫어 키(치)를 꽂았다.
- 좌우 뱃전 밖으로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을 걸고 신방 머리쪽에 멍에(가룡)를 가 로로 걸쳤는데 바로 이물(뱃머리)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 같다.

○ 신방을 따라가면서 안쪽으로 널판대기(포판)을 깔고 신방 위에 기둥을 세우고 방패를 둘러 세웠다.

○ 방패 위에 또한 언방(살림 집의 도리와 같음)을 걸었는데 신방(현란)에서 언방(패란)까지의 높이는 4 자 3치이다.

○ 언방(패란)의 좌우 안쪽으로 각각 11장의 거북 잔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다. 그 잔등에는 1자 5치의 틈(등골)을 내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 편하게 하였다.

○ 뱃머리(이물)에 거북 대가리(용머리)를 달았는 데 길이는 4자 3치, 너비는 3자가 된다.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미케 한다.

○ 좌우에 노가 각각 10척씩 있고, 배의 좌우에 각각 14개의 방패 그 방패에 각각 22개의 대표 구멍을 뚫었고 또 각각 12개의 문을 냈다.

○ 뱃머리(이물)의 거북 대가리(용머리) 위쪽에 2개의 대포 구멍이 있고, 거북 대가리(용머리)아 래에 2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대포 구멍이 있다.
거북 잔등 판 좌우에도 각각 12개의 대포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북 '귀'자의 기를 꽂았다.

○ 배의 내부구조
- 배의 좌우 포판아래에 방이 각각 12칸이 있는데
2칸은 철물 을 쌓아 두고
3칸은 대포화 활, 화살, 창, 검 등을 나누어 재어 놓으며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이다.
- 배 위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 칸에는 장교들이 산다.
병사들이 쉴 때는 포판 아래 선시레 있고 싸울 때 는 포판 위로 올라 모든 대포구멍에 대포를 걸어 놓고 끊임없이 쟁이고 쏘아댄다.

 
진왜란 해전에서 일본수군을 격퇴하고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측 수군은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었다 특히 그 주력은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이었다.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전술이나 지휘능력, 또한 거북선의 위력은 전승의 대행진이었으며 그리고 일선해상에서 직접 실전을 수행한 수많은 수군장졸들의 역전의 공과 희생이 전쟁을 뒷받침하는 데 실제의 전화 못지않은 겪었던 좌수영 관내 연해지역민의 활동상도 빼놓을 수 없다.
▶거북선 전투요원

화약(火藥)과 포탄(砲彈)을 장전하는 화포장(火砲匠), 포를 발사하는 포수(砲手),화전(火箭)과 대장군전(大將軍箭) 등 활을 쏘는 사수(射手).

▶거북선 전투방법
전투원들은 화포와 함께 화살 끝에 화약을 달아 놓은 화전(火箭)을 쏘았음 (거북선 안에서 쉴세 없이 쏘아 대는 포탄과 불화살로 공격을 받은 배는 불에 타서 침몰되는 경우가 많았음) 전투원들은 거북선의 이동방향(移動方向), 상대방의 위치에 따라 사방에 설치된 포문으로 공격함.

▶ 거북선의 전투능력
전투능력 탑승인원 : 전투요원 45명
노군(櫓軍) : 80명
노(櫓)의 수(數) : 16척
총포구(銃砲口) : 36~72개

○ 거북선은 파괴력이 크고 사정거리가 긴 천(天),지(地),현(玄),황(黃),포(砲) 등으로 무장.

- 천자포(天字砲)는 직경 11.7cm의 둥근 철환(鐵丸)을 발사하는 대포였는데, 이 포의 사정거리(射程距離)는 1300보(步)로서 500m가 넘는 장거리(長距離) 임.

- 지자포(地字砲)는 천자포보다 약간 작은 포탄을 쏘았으며, 사정거리도 350m가 넘는 장거리임

거북선은 상대방의 사정거리 밖에서 천자포와 지자포를 이용하여 마음놓고 포탄 공격을 할 수 있었음)

- 대장군전, 화전 등을 쏘았던 현자포(玄字砲), 황자포 (黃字砲)의 사정거리는 약 300m임.

- 승자포(勝字砲) : 가까운 거리에서 접전을 할 때에는 화약이 달린 화살을 쏘는 승자포를 사용함. 무게가 가벼워 이동이 자유로웠던 승자포도 사정거리는 200m가 넘는 장거리를 자랑함

천, 지, 현, 황포 등으로 공격을 받은 배는 대파되거나 불길에 휩싸여 침몰되었음


○ 거북선의 노는 양쪽에 8개씩 도합 16척이 있었으며 80명의 노군(櫓軍)이 담당하였고, 각 노에는 1명의 조장(組長)과 4명의 노군이 배속되어 있었음.

○ 평상시에는 노 하나에 노군 2명씩 교대로 노를 저었으며,

○ 전투시에는 노 양쪽에 2명씩 4명 전원이 전력을 다하여 노를 저음 (조장은 전투상황에 따라 전후좌우로 노 젓는 방법을 수시로 바꿀 수 있었음. 격렬한 전투 중에도 전진(前進)과 후진(後進),선회(旋回)와 정지(停止),가속(加速)과 감속(減速)이 자유자재로 조절될 수 있어 전투중 기동성이 더욱 뛰어났음).

이순신 승전보고서 기록

"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데 입은 총구멍이 되고, 용머리
위, 아래에 각각 2개씩의 포문이 있었습니다. 뒤는 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구멍이 있고, 등판 좌우에 각각 6개의
총구멍이 있었습니다. 또한 좌우 방패판에는 각각 22개씩
포구멍을 뚫었으며 문곁에도 각각 포구멍이 한 개씩 있고,
좌우 복판에도 각각 12개의 포구멍을 뚫었습니다.”

○ 거북선의 노(櫓)는 선체안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충돌 시에도 동요 되지않고 노를 저을 수 있음

※ 선체 밖으로 노가 나와 있는 상대방의 배는 충돌 시에 노가 부러져 사용할 수가 없게 됨

구분

옥포 해전

사천 해전

기간

- 1592. 5.7 ~ 8 (2일간)

-시 기 1592 . 5 . 29 일

군선
비교

- 조선 : 91척 (전선 30척,
협선 15척 , 포작선 46척 )

- 일본 : 44척 (옥포 26척 ,
합포 5척 , 적진포 13척 )

- 조선 : 26척 (이순신 함대 :
23척 , 원균함대 : 3척)

- 일본 : 13척

결과

- 44척 격침, 포로 5명 구출
전리품 획득 ,
조선 : 1명 부상.

- 왜 전선 13척 모두 격침
포로 1명 구출

의의

- 조선관군의 첫 승리
- 총통 대 조총의 해전
- 임란초기 왜군의 일방적인
공략을 저지

- 거북선 최초 출전,
돌격선으로 위력 발휘 ..

구분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기간

- 1592. 6. 2

-1차 : 1592 . 6 .5 .
-2차 : 1594 . 3 .4

군선
비교

- 조선 26 척


- 일본 21 척

- 1차 : 조선 - 51 척
일본 - 26 척

- 2차 : 조선 - 124척,
일본 - 50여척

결과

- 적함 21 척 격침..
아군 피해는 없음..

- 1차 : 적선 26척 격침,
아군 피해 없음
- 2차 : 적선 31척 격침
아군 피해 없음

의의

- 적정과 지형 관찰을 통한
정보 획득.
- 경계의 원칙 실용(탐망선
외양 배치로 기습 대비 및
주력대는 거북선을 선두로
공격 개시).
-화력 집중 원칙 실용
(거북선으로 적 기함인
누각대선에 화력 집중공격)

- 1차 : 전선 3척 포구내 지형 정찰 및 전선 4척을 도주 왜선 격멸 및 왜군 지원 함선 대비 복병으로 배치. 주민 보호 및 왜군 육상 도피 방지를 위한 후퇴 및 함대를 좌우 분산 이동 후 협격하여 섬멸
- 2차 : 불의사태에 대비한 예비대 편성. 경쾌선 31척 선발하여 은밀 기동 공격. 주력대의 퇴로를 차단 및 해상의 주요 수로를 장악하여 함대의 위용 과시.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으로 명령계통 일원화

한산.안골포 해전

부산포 해전

기간

- 1592 . 7. 8. ~ 10 (3일간)

- 1592 . 9 .1 .

군선
비교

- 조선 : 100여척
- 일본 : 한산도 : 70여척
안골포 : 40여척

- 조선 : 173 척
- 일본 : 470여척

결과

- 한산도 50 여척 격침
- 안골포 40 여척 격침

- 적선 128 척 격침
- 아군 피해 없음

의의

- 왜의 정예수군 격파로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왜의 호남진출을 좌절 시킴

- 고니시의 평양 이북 출동을 좌절

- 왜 수군을 부산포로 몰아넣어 남해 연해읍의 왜 침구를 막음..

- 왜선 집결지인 부산포 공격을 위해 강한 사전 훈련 및 야간 이동 실시. 장사진(종렬진) 편성하여 전선 격파를 위한 치열한 장기 포화전.
- 사후 대책 고려 및 적 후퇴로를 개방하기 위하여 일단 귀향. 수륙공격의 필요성에 대한 장계 올림

구분

옹포 해전

칠천량 해전

기간

- 1593 . 3 .3 .~ 4 . 3.

- 1597 . 7 .16 .

군선
비교

- 조선 : 89 척
- 일본 : 40 척

- 조선 : 268척

결과

- 적군 100명 사살 ,
- 아군 통선 2척 전복

- 조선 수군 거의 궤멸

의의

- 육군 요청 거절로 자체 병력 이용. 제포 및 안골포 좌우 상륙 공격 및 경쾌선 15척으로 주력대를 편성하여 돌진. 육전에만 사용되었던 비격진천뢰를 전선위에 장착하여 활용. 백성들의 농사 및 전력 정비차 귀향

- 7년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패를 당한 해전.
- 원균의 음주 태만으로 배설의 안전 구역 이동 건의 무시.
- 이억기 등 지휘관 및 대부분의 군사 전사. 전선 12척만 탈출(원균 사망)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에 416년 존속
(1479-1895년)

-이순신장군
8년간 전라좌수사
(1591-1598)

3도수군통제영

- 여수에 8년 존속
(1593-1601년)

-이순신장군
1대 삼도통제사
3대 삼도통제사
(2대:원균)


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15만 왜군은 파죽지세로 20일만에인 서울을 함락(5월3일)시키고 61일만에 평양(6월15일), 98일만에 함경도 회령까지 덮쳤다.

이 시기에 이충무공은 전라좌수영 본영 및 관하 5관(순천,낙안,보성,광양,흥양) 5포(방답,사도,여도,본포,녹도)의 수령 장졸 및 전선을 이 곳 전라좌수영에 총집결시켜 전라좌수영함대를 편성하였다.

전라좌수영관할( 5관 5 포) == [상위 지도 참조]
순천부(현 여수시, 순천시 일원)
보성군(현 보성군 일원 )
낙안군(현 보성군 벌교읍, 순천시 낙안면)
흥양현(현 고흥군 일원, 여수시 삼산면)
광양현(현 광양시 일원)

방답진(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사도진(현 고흥군 점암면 금사리)
여도진(현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본포진(현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녹도진(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첨부이미지 첨부이미지 첨부이미지 첨부이미지 첨부이미지 첨부이미지 첨부이미지 첨부이미지 첨부이미지 첨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