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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삼강주막

사오정버섯 2007. 2. 15. 15:20

경상북도의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삼강주막

 

경상북도의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소재 삼강주막이 옛 모습으로 복원된다.

경상북도는 지난 2005년 12월에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제304호)되었던 예천 삼강주막을 12억 원을 투입하여 3년 동안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개발키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1900년 전후에 건립된 삼강주막은 예천 용궁면과 풍양면이 만나는 낙동강 곡류점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으로 합류되는 강변에 있다. 이곳은 삼강나루의 나들이객과 낙동강을 이용하는 소금배, 보부상들의 숙식처, 또는 시인이나 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되어 온 곳이다.

이 주막은 이 시대 마지막 주막으로 건축역사 자료로서의 희소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옛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경상북도 측은 “이 주막의 주인이자 우리 시대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씨가 타계(지난 2005년 10월)한 이후 보수가 되지 않아 지붕, 기둥 등이 훼손되고 건물이 전체적으로 기우는 등의 보수가 시급했다”며 “역사 관광명소로의 개발 필요성이 적극 대두됨에 따라 도 직영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주막건물 복원을 우선으로 할 것이다. 기본 계획은 문화재 위원, 향토사학자들의 자문을 거치고 주민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수립할 것”이라며 “2008년부터 2년 동안, 주변 경관과 나루터 등을 복원, 조성하여 역사문화 관광지로 개발키로 했다”고 전했다.

 

 

 

 

 

 

 

 

 

 

ㆍ 위치 : 예천군 풍양리 삼강리 166-1
주요특색
삼강은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라서 붙은 이름으로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있다. 예로부터 이곳은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장사하던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렸고,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는 이곳 삼강 나루터를 꼭 거쳐 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여 이 주막등 상거래가 번성하였다.
그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상주군에 있는 한 목수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 사고도 나지 않고 큰 돈을 번다하여
연장을 가지고 이 나무를 베려하므로 사람들은 마을을 지키는 영험스러운 나무라 하여 베지 못하게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나무그늘이 좋아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을 날리는 노인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만약 이 나무를
해치면 네가 먼저 죽으리라"하므로 꿈에서 깨어나니 하도 생생하여 식은 땀을 흘리며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한다. 는 전설이 있다.
교통이용안내

예천읍에서 시내버스로 풍양면 소재지 경유 문경 영순방향으로 삼강까지 1시간정도 소요,
예천읍에서 40km 이내거리, 자가용으로 40분정도 소요

 

 

흔히 낙동강을 700리 또는 1300리라고 말한다. 강원도 태백의 황지연못에서 발원하여 부산 앞 바다까지 이르는 말이다(정확히 표현하자면 1300리의 낙동강이 옳을 것이다).

이 1300리 길은 얼마나 많은 애환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물론 그 곳에는 기쁨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숱한 슬픈 사연들도 있을 것이다. 이 1300리 머나먼 길목에 우리를 전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주막이 있다.

기쁨보다는 왠지 슬픈 사연이 더 많을 것 같은, 안내판 하나 없이 초라하게 숨어 있듯 홀로 서 있는 주막. 낙동강변의 이 시대의 마지막 주막이라고 일컬어지는 곳, 바로 '삼강주막'이다. 이 주막을 보는 순간 마치 세월이 멈춰선 듯 이 시대와 너무나 먼 것 같은 옛 모습에 그만 숨이 막힌다.

 

                     

ⓒ2004 최정균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힘센 장정 두세 명이 밀어붙이면 곧 넘어갈 것 같은 80여 년이 다된 흙벽의 15평 정도 조그마한 주막이 쓰러질 듯 서 있다. 옆으로 굽은 나무 기둥들이 아직도 지푸라기가 듬성듬성 보이는 진흙벽 속에 묻혀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예전에는 초가지붕이던 것을 강에서 불어오는 심한 바람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스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는 예전 그대로라고 한다. 두 칸짜리 작은 방과 부엌 하나가 전부다.

이 곳은 회룡포를 거쳐 내려오는 내성천과 이웃 용궁면을 휘감아 내려오는 금천이 만나 하나의 낙동강을 이루는 곳, 즉 세 개의 강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삼강리(三江里).

 

 

                

ⓒ2004 최정균
유옥연(88세) 할머니가 지금도 이 주막을 홀로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연세가 많은데도 놀랄 만큼 곱고 예쁜 얼굴, 시집오실 때 해온 이불을 지금도 고이 간직하며 살아가시는 할머니이시다.

이 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가을걷이가 막 시작되는 10월 초. 몇몇의 지인들과 동행하던 길이었고 늦은 오후였기에 할머니와 말씀도 나누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세 번 이곳을 찾았다. 가슴이 뭉클하도록 할머니로부터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강타한 태풍 도카게 때문인지 먹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서 짓누르고 을씨년스럽게 바람도 강한 날이었다. 할머니는 변함없이 앞 마당을 쓸고 계셨다. 연세에 비해 아직도 정정하시고 지저분한 것은 보지 못하는 정갈한 성격 때문에 잠시라도 제 자리에 계시지 않으신다.

 

 

              

ⓒ2004 최정균
"예전에는 주막이 세 개가 더 있었어. 그때는 나루를 건너는 사람들도 많았지. 장날이 되면 점심 때에 막걸리가 동이 나고 장사도 잘 되었지. 하루에 나룻배가 스무 번이나 더 건넜으니까. 길도 많아지고 다리들도 생기니 나룻배도 없어지고, 사공들도 떠나 어디론가 갔지. 사공들에게는 농사지어 쌀 몇 됫박, 보리 몇 됫박을 주었어. 다들 어렵게 살 때잖아."

말씀을 하시는 동안 할머니는 이미 옛날 속으로 돌아가신 듯했다.

강 이곳과 저쪽을 이어주던 나루터.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작은 주막.
강을 건너려면 나루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잠시 주막에서 컬컬한 목을 막걸리로 달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예쁜 주모에게 취중에 장난기 어린 농담도 걸지 않았을까? 또한 이 마을 저 마을의 소문과 화제가 자연스럽게 입소문으로 전해지던 곳도 이러한 주막이었을 것이다.

짧은 말씀 속에서 예전에 사람들로 북적이던 이곳이 어떠했는지 짐작해 본다. 지금도 나루터라 칭하는 곳의 주막이지만 이미 20여 년 전에 나룻배는 없어지고 바로 뚝 너머 낙동강변 무성한 억새 속에 형태를 알 수 없을 만큼 쪼개져 나뒹굴고 있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연년생 여동생은 얼굴도 모른 채 어렸을 때 사망) 친정은 이미 대가 끊겨 인척이 없다고 하시는 할머니. 노년에 이러한 것들이 더욱 할머니를 외롭게 만드나 보다.

풍양면 음앙골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두 살 위 신랑인 배씨와 정혼 후 바로 지척에 있는 삼강리 마을에 살면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적은 농사일을 하며 5남매를 낳았다. 6·25 전쟁 바로 직전에 병고로 남편과 사별하였으니 이미 56년이 되었다.

유복자인 막내(55세)를 낳았을 때 6·25 전쟁이 터지고 이곳까지 밀어 닥친 북괴군에게 고초도 당한다. 핏덩어리 막내를 괴뢰군들이 보더니 "애 낳수다"하며 밤새도록 총칼을 번뜩이며 괴롭히다가 보리짚단 속에서 잠시 잠을 자더니 이른 새벽에 도망치듯 떠났다고 한다.

남편과 사별후 손바닥만한 농사를 지으며 5남매를 키우기가 벅차 지금의 이 곳으로 내려와 옛주인으로부터 이 주막을 넘겨 받아 시작한 게 할머니 나이 마흔살 때. 이때부터 이 주막에서 48년간을 살고 계신 것이다.

그때는 경남 김해쪽에서 올라오던 소금배들도 있었고, 산 넘어 풍양쪽에서 문경을 거쳐 서울로 가는 이들도 많았고, 마을 사람들이 농사일을 하려면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제법 붐볐던 곳이었단다. 그후 아랫마을에 조그마한 다리가 생기고 70년경에 도로들이 확장됨에 따라 주막을 이용하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뜸해지고 나룻배와 사공들도 없어졌다.

무더운 여름이면 삼강리 노인 몇 분이 내려와 200년이 더 된 회화나무 그늘 밑의 평상에서 맥주 몇 병을 마른 멸치와 고추장으로 안주하며 나누는 객담이 유일한 낙이다. 차량으로 오가다 옛 전설에나 나옴직한 이 시대의 마지막 주막인 이 곳을 타지 여행객들이 가끔 찾아올 뿐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2004 최정균
"저 다리 때문에 이제는 마을이 안 보여. 짐차밖에 다니지 않아 시끄럽기만 하구."

영순과 풍양을 잇는 새로운 도로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이 주막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새로운 도로가 내심 불만이시다. 삼강교를 현대식으로 건설하며 도로를 높이느라 뚝을 쌓고 그 위에 도로를 냈기 때문에 마치 주막과 마을을 갈라놓은 듯하다. 그래서 할머니는 더욱 외로움을 느끼시는가 보다.

할머니와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예천군 직원 두 분이 답사를 왔다. 낙동강변에 유일하게 남은 이 주막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이미 도에 요청했고, 내년에는 예산을 할당받아 보수공사를 할 예정이란다. 가급적이면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보수할 계획이며 초가지붕으로 운치있게 꾸밀 계획이란다. 이 말씀에 할머니는 벌써 걱정이 앞선다.

공사 기간 중 잠시라도 어느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신 모양이다. 아무쪼록 할머니에게 불편이 없도록 잘해 주었으면, 그리고 현대식이 아닌 옛 모습을 가능하면 유지한 채 보수공사를 해 주었으면.

"고기는 왜 사와. 나 고기 못먹어. 라면이라도 끓여 줄까?"
"제 걱정 마시고 할머니나 챙겨 드세요."

무슨 말씀을 더 하실 것 같은, 아니면 남에게 말 못할 많은 사연을 지니고 계신 듯한 할머니의 서글픈 표정을 뒤로 한 채 그 곳을 떠났다. 아마 오랫동안 주막을 지키고 있는 회화나무만이 그 사연을 잘 알고 있으리라. 할머니가 편찮으신 곳 없이 오래 오래 옛 이야기를 머금고 살아가셨으면….

어느덧 해는 서쪽산 뒤로 숨고 태풍 뒤끝에 남아 있는 먹구름 속으로 한줄기 석양빛이 주막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2004 최정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