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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사오정버섯 2007. 4. 3. 21:17

訓民正音

 

 

 

새로운 문화를 이끄는 매개체

                                   

 

 

                     

 

 

훈민정음이란 우리 말을 적은 글로서 15세기 중반 조선의 세종대왕이 발명했고 현재는 '한글'이라고 불리고 있다. 1446년 이 문자 체계가 국민들에게 공표되면서, 이 문자를 만든 원리와 용례들을 해설하는 책이 함께 출판되었는데, 이 책의 제목이 또한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의 출판과 내용에 관해서는 다른 문헌에서 간접적으로 일부 내용이 알려져 오다가, 실제 문헌이라 할 수 있는 원본이 1940년에야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어 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다. 이 원본은 현재 서울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훈민정음'은 1997년에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기록유산 가운데 포함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훈민정음'을 중심으로 한글의 구성과 그 원리를 살펴보고, 한글 발명이 갖는 독창성과 문화사적인 의의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우리말을 기록한다

 

세계 여러 민족과 나라에서 쓰고 있는 언어는 무려 4,000여 종류나 된다. 이 가운데 한글은 현존하는 몇 안되는 기록문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민족들이,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글로 적을 수 있는 고유한 문자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는 로마 문자를 빌려서 혹은 그것을 변형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칼어, 불어, 독일어, 이태리어와 같은 인도 유럽어들뿐만 아니라,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터키어 등도 로마 문자이거나 그것을 변형한 것이다.

또한 스와힐리어, 하우서어등 주요 아프리카 언어들과 심지어 베트남어도 로마 문자로 기록되고 있고, 이와 형태가 유사한 시릴 문자를 이용하여 러시아어 등의 슬라브계 언어들도 기록되고 있다. 물론 아프리카의 많은 언어들과 미주 대륙의 토착 언어들은 고유한 문자가 없었으며, 서구 문화가 유입되면서 로마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세계 대부분의 언어는 그것을 기록할 문자가 없어서 그 기록을 남길 수 없다.

한국어를 쓰는 인구는 세계의 주요 언어들 가운데 열다섯 번째로 많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민족에게 자신의 말을 기록하는 한글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문화사적 의의를 갖는다.

소리를 사용하는 말은 일단 의사 전달이 되면 사라져 버려서, 문자로 기록하지 않고서는 시공간으 장애를 초월하여 의사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말을 기록하는 문자가 없으면 그 문화를 효과적으로 전승하고 계발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구전되는 문화가 없는 것은 아지지만, 풍부한 문학, 역사, 학문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많은 민족들에게는 문자가 필요했다. 언어가 인간에게 고유한 의사 소통의 체계라면 문자도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선물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말을 적은 글을 한글이라고 한다. 1443년(세종25년)에 처음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가 발명된 이후 지금까지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글로 기록하기 위해 아무 불편없이 사용되어 왔다. 훈민정음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먼저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만든 28개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문자 체계에 처음으로 붙인 이름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문자 체계의 형성 원리와 사용에 관하여 설명한 책이 1446년에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제목도 <훈민정음>이다(<훈민정음해례본>이라고 함). 대부분의 문자는 그 기원이 불분명하거나 신화적인 데 비해, 한국어를 기록하는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은 그것을 처음 만들었을 때 이미 그것을 만든 목적과 원리 및 사용법을 설명하는 책도 함께 출판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문자, 가장 효과적인 의사 전달 수단

 

인간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크게 세 가지 수단을 사용한다. 음악과 같은 청각적 수단, 그림과 같은 시각적 수단, 그리고 언어적 수단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 언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많은 민족들은 오랜 기간 문자를 만들고 사용해 왔는데, 그렇게 해서 문자를 갖게 된 민족들은 자기들 문자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기록했다. 고대 그리스, 중국, 바빌론, 이집트의 신화에서는 자기들이 사용하는 문자를 그들이 숭배하는 신들이 가져다 준 선물이라고 기록했다. 또 이와 같은 기록은 유대 민족의 <탈무드>에서도 나타나며, 이슬람의 전설에도 나타난다.

까마득한 옛날 중국이나 잉카 문명을 보면, 줄에 매듭을 맺거나 나무에 기호를 새겨서 정보를 기록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 기록에도 나무에 새기는 방식으로 정보를 보전하려는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북부 스페인의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에서도 그림으로 많은 정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그림은 당시 사용하고 있던 언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기보다, 전달하려는 정보의 의미를 시각화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시의 언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이러한 의사 전달을 위한 그림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러한 그림에서 상형문자가 형성되었다. 특히 고대 중국의 기록 체계와 고대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가 바로 상형문자에서 출발하였고, 이들이 한자와 여러 음성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훈민정음은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음성 문자들과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소리를 기호로 나타내는 음성 문자는 일본의 가나 문자와 같은 음절 문자와, 로마 문자와 같은 알파벳이 있는데, 훈민정음은 로마 문자와 같이 음절을 이루는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어 표기하는 것으로 보면 음절 문자와는 다르다. 또한 훈민정음은 각각의 글자가 개개의 소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글자의 모양이 그에 대응하는 소리의 음성적 특성을 드러내며 소리들 사이의 음성적 상관성을 체계적으로 나타내고 있어서, 흔히 음성 자질 문자라고 말한다.훈민정음이 이러한 음성 자질에 근거하여 발명됐다는 것은 현대 언어학적으로 봤을 때에도 특기할 만한 것이다.

 

국민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25년) 12월에 완성했는데, 이것을 3년뒤인 1446년 9월 <훈민정음>이란 해설서와 함께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게 되었다. 훈민정음에서 '훈민(訓民)'은 국민을 가르친다는 뜻이고, '정음(正音)'은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은 '국민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가 국민들을 가르쳐서 쓰도록 하기 위해 만든 문자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이란 이름을 간단히 줄여서 정음(正音이라고도 하고, 언문(諺文), 반절(反切), 국문(國文)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을 1910년대 초에 주시경을 비롯한 국어학자들이 '한글'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한글이란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면 훈민정음을 발명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한민족은 일찍이 고대 삼국시대로부터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기록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말은 현대 한국어를 형성해 온 언어를 말하는데, 우리말은 있으되 그것을 글로 적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의 한자를 사용해서 중국말이 아닌 우리말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어를 기록하는 문자인 한자를 가지고 한국어를 기록한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현대 한국어를 로마 문자로 적는다고 생각해 보자. 하물며 중국의 한자는 각 글자가 뜻을 담고 있는 표의 문자(혹은 단어 문자)라서, 이것으로 한국어를 기록하는 일은 아주 불펴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한자로 기록한다 해도 그 소리와 뜻이 잘 통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발며앟게 된 첫째 이유였다.

<훈민정음>의 맨 앞에는 다음과 같이 훈민정음을 발명한 목적을 밝혔다.

 

 

임금이 지으신 훈민정음.

우리나라의 말은 중국과 달아서, (우리나라 말과) 한자로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불쌍한) 백성들이 (제 의사를) 나타내려고 해도 결국 자기의 생각을 (글자로) 적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나(세종대왕)는 이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 여덟 개의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이 문자를) 쉽게 배워서,매일 쓰는데에 편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발명한 이유는 당시 조선의 국민들이 문자를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세종대왕의,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 담겨 있다.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한자를 써서 자기의 뜻을 적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자 문화권에 안주하려고 한 일부 계층만이 문화를 독점하는 것은, 우리 민족 문화 발전에도 크나큰 저해 요인이었다. 훈민정음이 발명된 이후에도 한자 문화권에 젖어 있던 일부 기득권 계층 때문에 훈민정음을 사용하는 범위가 제한되어, 시조나 시자, 소설등의 일부 문학과 여성들의 서간문에서만 사용했다. 이러한 형태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면서, 우리 민족은 우리말과 그것을 적은 글이 일치하지 않는 어려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1896년에 이르러서야 고종의 칙서를 통해 한글의 사용을 권장하게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한민족은 드디어 한글 문화의 새 장을 맞게 되었다. 물론 한글은 20세기 초반 일본 제국주의의 신민화 정책에 의해 소극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지만, 조선어학회(현재의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한 한글 운동과 함께 한글의 쓰임이 점차 확산될 수 있었다. 1945년 이후부터는 공교육에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한글은 한국어를 적는 문자로서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문맹률도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문맹인구가 거의 없게 되었다.

한민족은 이제 현대사에서 세계 문화의 변화와 발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민족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이것을 이루는 데 무엇보다도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한글이다.

한글이라는 문자를 통해 우리 민족은 일반 교육과 제반 문화를 모든 계층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 문명의 첨단에 서서 모든 국민들이 그것을 누리고 그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음양오행에 바탕을 두다

 

한글 발명의 가장 주요한 학문적 배경은 중국 음운학과 송나라 성리학이다. <훈민정음>의 "제자해(制字解)"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천지의 도(우주의 근본 원리)는 하나의 음양오행일 따름이다......그러므로 사람의 말소리도 모두 음양의 이치를 지녔건만, 다른 사람이 살피지 못할 뿐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말을 태극(太極), 음양(陰陽), 오행(五行)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원리가 이 세 가지에 있다고 생각한, 송대와 전통적인 중국의 철학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자음을 아음(牙音), 설음(舌音), 순음(脣音), 치음(齒音), 후음(喉音)의 다섯 가지 부류로 나누었고, 이들을 각각 오행의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에 대응시키고 있으며, 모음을 고안한 원리는 음양설과 태극설을 원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훈민정음의 발명과 함께 이루어진 세종대왕의 중요한 정책은 한자음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가 사용하던 한자음이 혼란스러웠다는 기록은 <훈민정음>이 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448년(세종30년)에 발간된 <동국정운>의 서(序)에 나오는 신숙주의 글에서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스승이나 일반 선비들이 반절법(反切法)도 모르고 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몰라서, 혹은 자형(字形)이 비슷하면 같은 음으로 하고.....혹은 두 글자를 합하여 하나로 하고, 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며, 혹은 다른 글자를 빌고, 혹은 점이나 획을 더하거나 덜기도 하며, 혹은 중국 본토음을 따르고, 혹은 우리나라 음을 따라서 자모와 칠음, 청탁, 사성이 모두 변하였다......만일 한 번 이를 크게 바로 잡지 않는다면 날이 갈수록 잘못된 것이 심해져서 장차 이를 바로잡지 못할 폐습이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 발명 당시에는 이미 조선의 한자음과 중국의 한자음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이것을 정비하기 위해서 훈민정음의 문자를 사용하여 한자음을 정비한 것이

<동국정음>이다. 세종대왕은 운서(韻書)를 바로잡는 일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를 수행할 수 있을만큼 중국 음운학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숙주는 <홍무정운역훈>의 서(序)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 세종 장헌 대왕께서는 운학(韻學)에 유의하사 그 깊은 데까지 몸소 연구하시어 훈민정음 약간자를 창제하시니, 사방 만물의 소리를 전할 만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 글을 보면 훈민정음 발명에 중국 음운학이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은 또한 조선의 숭유정책에 따른 성리학의 태극, 음양, 오행사상과 함께 <훈민정음>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발명 당시 중국 음운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당시 한국어의 말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 중국 음운학의 말소리 분석 방식을 수정한 독특한 표기법을 고안해서 사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한자음의 분석은 반절법이라 하여, 하나의 한자를 성모와 운모로 분석한다. 성모는 해당 한자의 첫 자음을 말하며, 운모는 나머지 부분의 소리를 말한다. 예를 들면 한자 '군(君)'의 성모는 [K]이며, 운모는 [UN]에 해당한다. 그런데 훈민정음을 발명할 때에는 운모를 다시 중성과 종성으로 분석하여, 한자 하나를 결국 세 부분으로 분석하는 삼분법을 따랐다.

여기에서 성모 자음을 초성이라 하고, 중성은 모음을, 종성은 마지막 자음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군(君)은 초성[K]와 중성[U]와 종성[N]으로 분석된다. 이렇게 해서 훈민정음은 당시 말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었다. 즉 훈민정음은 유한한 수의 자음과 모음으로 수많은 음절을 조합할 수 있는 표음문자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