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① 식민지의 아버지
★...비협조적인 버마인들이 쳇바퀴에서 벌을 받는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지난 1월, <인터넷한겨레>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중국의 세기>에 이어 영국인들의 독특한 삶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2-영국의 세기> (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머나먼 외국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책임졌던 젊은 외교관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그 패션을 모방하곤 하는 에드워드 시대의 우아한 사람들, 디킨스의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빈민가의 귀화인들, 우풍당당했지만 온갖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왕족들, 조지 오웰 등 천재 문학가들...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영제국 100년의 모습을 생생한 사진으로 전한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식민지의 아버지 2. 왕실스캔들 3. 노동자들의 삶 4. 전쟁수행역할 5. 여왕여제 6. 예술가의 초상 등이다.
» 체포된 버마 반란군들이 나무 구조물에 묶여 있다. 제공
버마는 영국의 지배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식민화 과정은 1824년에 시작되었지만, 1885년에 상부 버마가 함락될 때까지 완수되지 못했다. 이 나라는 1937년의 자치 법령에 의해 직할 식민지가 될 때까지 인도의 한 지역으로 편입되어 통치되었다. 여기서 사진사는 엄청난 도덕적 딜레마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제국은 영국의 패권을 의미했다. 제국은 또한 자유를 대표한다고 자임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할 수는 없었다.
1900년 인도 체낙사바 사원에서 야영 중인 한 여행객. 제공
넘쳐나는 자신감과 남의 집을 자기 것인 양 다루는 뻔뻔함이 사진에 잘 나타나 있다. 1900년에 이 여행객이 야영한 곳은 인도의 체낙사바 사원이다. 이 위대한 아대륙과 3억의 인구가 겨우 5,000명밖에 되지 않는 영국의 인도 관할 공무원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영국군 역시 인도 군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숫자였다. 인도 육군은 영국 장교들이 지휘했지만 50년 전에도 그랬듯이 항상 반란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산술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인 개개인들은 항상 우월함을 과시해야만 했다. 물론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권위’와 노골적인 오만함은 때때로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브리티시 라지’라고 불렸던 영국의 인도 통치는 페어플레이로 명성을 날렸는데, 이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인도 총독이었던 커즌과 거부의 상속녀이자 미국 출신인 그의 부인이 1902년 4월 하이데라바드 근처에서 포획물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뛰어난 사격솜씨를 지녔던 그는 호랑이 사냥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 녀석이 다가오면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소. 그 녀석 발밑에서 잎사귀가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 해 가을 그는 베트와 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자신이 다비셔 출신임을 새삼 느끼고 있다.
헨리 경(가운데)이 대형동물 사냥에서 잡은 희생물들 앞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서인도 제도 식민지의 젊은 행정관이자 허리케인 보험의 창시자이기도 했던 헨리 경은 관개 시스템과 실험적 플랜테이션도 만들어냈다. 그는 바베이도스, 그레나다, 골드코스트(현재의 가나), 그리고 도미니카 등의 발령지를 돌아다녔다. 우간다를 떠난 후 그는 북부 나이지리아 총독으로 승진했지만, 런던으로부터의 명령을 거스르고 선교사들의 카노 행을 허락함으로써 경력을 망쳐버렸다. 이 일로 리워드 제도의 총독으로 좌천되었으며, 마지막 직책은 1924년의 모리셔스 총독이었다. 많은 회고록, 소설, 마법 연구서 등을 저술했으며,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식민 제도에 관한 연구로 특히 유명하다.
믿지 못할 영국인. 1910년에 인도에서는 아편이 조심스럽게 측량·등록되는 등 엄격한 생산통제가 시행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영국 선교사들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평안을 전파하러 중국에 갔지만, 그곳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영국이 통제하는 아편무역으로 인해 유린당한 마약 중독자들이었다. 1910년에 인도에서는 아편이 조심스럽게 측량·등록되는 등 엄격한 생산통제가 시행되었다. 아편전쟁 때와 같은 무자비한 해군력의 행사가 1842년의 홍콩 점령에서도 되풀이되었는데, 이는 중국 시장을 영국의 아편업자들에게 개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편거래는 이후 영국령 인도에서의 세입 가운데 7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1899년 3월 17일 홍콩의 스탈렛 만에 ‘새 영토’를 나타내는 최초의 경계표지가 세워지는 모습. <북폴리오> 제공
중국 본토의 ‘새 영토’는 홍콩 섬의 방어를 위해 임차되었는데, 홍콩은 이미 1842년에 영국에 영구적으로 할양되었다. ‘새 영토’ 임차의 종료와 함께 1997년 7월 1일에 중국 내 식민지 전체가 반환되었다. 식민지배 하에서 번영을 구가했던 홍콩의 중국인들은 이 무렵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인도의 마지막 총통 로드 마운트배튼의 부인 레이디 에드위나 마운트배튼이 델리에 모인 7,000명의 하객 앞에서 영국령 인도 및 그녀의 친구이자 인도의 새 수상인 네루 선생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인도는 영국이 제국 가운데 가장 먼저 철수한 곳이자 가장 끔찍한 유혈 사태가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인도는 1947년에 독립하면서 결국 인도와 이슬람 파키스탄으로 분할되었다. 인도의 새 수상 네루는 잉글랜드의 해로학교에 다녔는데, 1906년에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애국자 가리발디의 전기를 읽었다. 이제 그 독서가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유적지·자료 > 역사·희귀 자료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남전쟁 그때 그시절 (0) | 2007.04.02 |
---|---|
앙부일구-해시계 (0) | 2007.03.29 |
1300만 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돌고래 화석 (0) | 2007.03.27 |
다라니경-세계 최고의 인쇄물 (0) | 2007.03.22 |
‘진위논란’ 윤봉길 의사 사진 알고보니 31년전 보물지정 (0) | 2007.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