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동물·곤충/곤충류·나비

귀뚜라미의 8주 인생

사오정버섯 2007. 2. 23. 22:21

첨부이미지

[권오길의 자연이야기] 귀뚜라미의 8주 인생

‘귀뚤귀뚤’ 가을의 전령인 귀뚜라미가 노래를 불러댄다. 설악의 대청봉에 단풍불이 일었다니 초가을이라 해도 될 듯하다. 여름이 매미 철이라면 가을은 귀뚜라미의 계절이다. 야행성인 귀뚜라미는 야상곡(夜想曲, 형식이나 내용이 자유로운, 낭만파의 피아노를 위한 소곡)을 즐긴다. 눈 감고 귀기울여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스르르 남의 애를 끊고야 만다. 애절함의 극치다.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막히는 늙은이의 조급함 때문일까. ‘봄은 모든 이를 시인으로 만들고, 가을은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는 말에 동의한다.

‘만물은 다 제자리가 있고(萬物皆有位), 모두 이름이 있다(萬物皆有名)’는 말처럼 곤충들도 철과 시간대(밤낮)가 있다. 귀뚜라미도 종류에 따라서 밤에만 노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녀석도 있고, 가을이 아닌 늦여름에 우는 종류도 있다. 저 멀리 밭가에서 노는 놈, 가까운 뜰에서, 또 섬돌 아래서 낄낄거리는 녀석도 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힘들여서 끊임없이 목청을 울려대는 것일까? 하나는 자기 영역을 알려서 다른 것들이 경계를 넘어들지 못하게 하는 경고의 내지름(텃세)이고, 또 하나는 암컷에게 자기 있는 곳을 알리는 구애(求愛)의 사랑노래다. 보통 소리가 굵고 우렁차며, 힘이 들어 있는 수컷은 건강한 놈이다. 암컷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강한 유전자를 가진 그런 수컷을 짝 삼기 위해 서슴없이 달려간다. 사람도 이런 점에서는 하나도 다르지 않다.

암컷들은 왜 하나같이 음치(音癡)일까? 대개의 경우 암컷은 진한 영양분이 가득 찬 커다란 알을 낳지만, 수컷은 에너지가 적게 드는 값싼 정자를 만든다. 수컷은 아무리 소리를 질러 힘을 쓰더라도 정자를 만드는 데 큰 문제가 없으나, 암컷은 노래 소리에 드는 에너지까지 아껴서 알에다 쏟는 것이다. 암놈은 어느 것이나 경제적인 동물이다.

귀뚜라미는 세계적으로 2400여종이나 되며, 우리나라에도 13종이 살고 있다. 귀뚜라미는 가늘고 긴 더듬이, 또 잘 뛰도록 변한 튼튼한 뒷다리와 두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날개 중 바깥쪽 것은 딱딱하고 안쪽 것은 얇은 막으로 되어 있다. 귀뚜라미가 날 때는 안쪽 날개를 쓴다. 그럼 바깥쪽 날개는? 그것은 안 날개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바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다. 한 쪽 날개에 오톨도톨한 돌기(이빨)가 붙어 있어서 다른 쪽 날개를 그곳에 비비면 ‘끼르륵, 귀뚤’ 소리가 난다.

2400여종 전세계에 분포

귀뚜라미는 종류에 따라 이 돌기의 크기와 개수가 달라서 내는 소리도 다르다. 곧 같은 종류는 같은 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귀뚜라미는 주변 온도가 높으면 더 빨리 울어 제친다. 재미있는 것은 귀뚜라미가 앞다리로 소리를 듣는다는 점이다. 소리를 듣는 ‘귀’가 바로 앞다리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귀뚜라미는 이처럼 다리로 듣고 날개로 소리를 내는 신기한 벌레로다!

귀뚜라미는 딴 곤충과 마찬가지로 암컷이 수컷보다 몸집이 더 크다. 짝짓기를 끝낸 암컷은 꼬리 부분에 있는 길고 뾰족한 산란관(産卵管)을 식물의 줄기에 꽂아 알을 낳는다. 물론 알은 가을 끝자락에 가서 낳는데, 다음해 봄에 이 알에서 유충이 깨이고, 그 애벌레는 두 번 탈피(껍질 벗기)를 하여 성충(成蟲)이 된다. 다른 벌레들도 그렇지만 귀뚜라미는 고작 6~8주를 살고 죽는다.

‘귀뚜라미는 7월에는 들녘에서 울고, 8월에는 마당에서 울고, 9월에는 마루 밑에서 울고, 10월엔 방에서 운다’는 말이 있다. 귀뚜라미가 주변 온도에 꽤나 예민하기에 나온 말일 것이다. 또 ‘방에서는 글 읽는 소리, 부엌에선 귀뚜라미 우는 소리’라는 말은 공부할 분위기가 잘 갖춰진 아늑한 가정을 일컫는 말이다. 자! 날씨 좋은 이 가을에 한껏 책읽기에 빠져보면 어떨까? 귀뚜라미도 밤새워 책장을 넘기는 가을밤이다.

강원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okkwon@kangwon.ac.kr)

'새·동물·곤충 > 곤충류·나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렁이의 섹스  (0) 2007.02.23
거미의 사랑  (0) 2007.02.23
고추잠자리의 교미  (0) 2007.02.23
더듬이를 네 개나 가진 달팽이  (0) 2007.02.23
무당벌레를 잡아 먹는 사마귀  (0) 2007.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