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국적자 단재 신채호 선생님
작년 한열사에서는 단재 신채호 선생 국적회복운동 서명운동을 벌였습니다. 올해는 꼭 국적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망자(亡者)에 대한 국적회복법이 없다' 세운 공은 크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이전에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망자에 대해서는 국적을 회복한다는 법조항이 없어 국적을 회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제정을 한다고 했으나 호응하는 의원수가 적어 현재 유야무야인상태다.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범국민적운동으로 벌여나갈 계획이다"고 밝혔다. 너무도 당연한데 법이없다는 이유로 국적회복을 시키지않는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고 개탄했다. 자손들은 여전히 권력과 부를 대물림 하며 잘살고 있는데 정작 나라를 구하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버린 애국지사는 무국적자가 되고 그 후손들 또한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1912년 만든 조선민사령 속의 호적법에 기재되지 못하고 황국신민이 아닌 '조선인'으로 남게 되었고 '조선'이 일제에 병탄되면서 졸지에'무국적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단재가 해방조국에서 또 다시 무국적자가 된 사유다. 일제가 남긴 기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1880년 11월7일 외가가 있던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도리내)에서 태어났고 이후 본가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내리에서 성장한 것으로 되어있다. 영당을 도 기념물(90호)로 지정해 놓았다. 정부는 1962년 단재에게 독립유공자 지위를 부여하는 한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역설적으로 단재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하며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 단재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했고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어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국적법상 국적회복이 되지 않은 채 사망한 경우 적용할 법이 없다는 이유로 무국적자로 남아 있어야한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설명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기리는 의미에서도 형식주의를 인용하기 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따라 망인일지라도 국적을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
▲ 단재 신채호 선생. | |
ⓒ2006 이덕남 |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36년 2월 18일, 황사가 지나는 길목인 랴오닝 반도의 끝 뤼순(旅順) 감독에서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한 인물이 뇌일혈로 쓰러졌다. 부인과 가족들이 급히 도착했지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3일 뒤인 21일 오후 4시20분 차가운 감옥의 바닥에서 옥사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11시, 쓸쓸히 감옥 옆 화장장에서 한줌의 재만 남긴 채 떠나갔다. 그가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1910년 3월 같은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된 지 26년 만에 같은 길을 떠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사학자이자 언론인, 그리고 문학, 철학,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선구적인 활동을 해온 독립 운동가였지만 서거한 지 7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한국 국적이나 호적조차 갖지 못한 상태다.
2005년 여름 <단재 신채호 평전>을 낸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E.H. 카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인용하면서 단재의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대결>은 외면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고 통탄했다. 실제로 젊은 사람들도 남미의 혁명 전사 체 게바라는 표상화 하지만 단재에 대해서는 무감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 단재는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100년 전에 통감했던 인물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훼손되는 고구려사는 만약 단재가 없었다면 훨씬 초라했을 것이며, 최근 재평가 받고 있는 '의열단'의 투쟁도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이 없었다면 훨씬 초라했을 것이다.
올해는 단재 선생이 서거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그가 베델이 주도한 <대한매일신보>에서 언론생활을 시작한 지 10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 안중근 의사와 단재 선생이 목숨을 잃은 뤼순 감옥. |
ⓒ2006 조창완 |
체 게바라는 알아도 단재 신채호는 모른다?
1880년 11월 7일 충남 대덕군 정생면에서 태어난 단재 선생은 10세에 행시(行詩)를 짓고, 13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신동이었다. 그는 1905년에는 성균관의 박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해 을사늑약이 일어나고 민영환이 자결한 데 이어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면서 그는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그의 모든 활동은 국체의 유지에 맞춰졌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자 칭다오(靑島)를 경유해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이후 감옥에서 서거할 때까지 그곳에서 신문발행, 의열단 활동 지원 등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 백탑사 맞은 편 진스팡지에 21호는 신채호 선생이 1920년 결혼 후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이 건물도 92년에 증축했고, 1~2년 안에 완전히 철거될 예정이다. |
ⓒ2006 조창완 |
단재는 포괄적인 지식으로 당대의 독립 운동을 정확히 파악했다. 초반기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치며 나라의 운명을 미국 등에 맡기겠다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를 철저히 반대하는 등 역사가 흘러갈 방향에 대해서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대신 그는 무장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한편 김원봉의 '의열단'에 방향지침서인 '대한독립선언'을 써주며 사상의 방향을 인도했다.
단재는 일찌감치 고구려 등 상고사에 대한 정리를 확실히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신라 김유신이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임으로써 단군 이래 일궈온 민족 터전의 4분의 3을 잃게 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신라가 통일 후 고구려 땅 수복 노력을 게을리 한 점을 강조하며 이런 관점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는 단군 이래 융성한 민족사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는 동북공정을 앞세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단재 사상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기만 하다.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국적은 여전히 '무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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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단재의 국적회복이나 호적문제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단재는 일제가 조선민사령을 제정해 조선인 호적을 장악하기 전에 중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호적상 무국적인이 된 후, 중국에서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국적이 없는 상태다.
지난해 8월, (사)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주최로 신채호 선생 국적회복을 위한 공정회를 개최해 단재를 비롯한 무국적자 신분의 독립유공자들의 국적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단재 선생을 비롯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독립유공자 예우를 위해 신기남 의원 등이 '무국적사망독립유공자의 국적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까지도 국회에 계류된 상태로만 남아있다.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온라인 상에서 수천명이 이에 지지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도 했으나 단재의 국적을 회복해주지는 못했다.
또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안치됐던 단재 선생의 묘소도 98년 홍수 이후 붕괴된 이래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가묘상태로 남아있다. 누추하기는 가묘로 남아있는 묘소뿐만이 아니다. 이런 어려움은 단재의 유족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곤궁하게 이어져온 후손들의 삶
▲ 단재가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던 베이징대학의 웨이밍후와 급수탑. |
ⓒ2006 조창완 |
단재는 16살에 고향에서 결혼을 했지만 타국 행을 결정하면서 부인과 이별했다. 자칫 후손이 없을 뻔하다가 40세인 1920년 연경대학에 유학중이던 28살의 박자혜 여사와 재혼해 다음해 맏아들인 수범을 낳았다. 하지만 독립운동 중에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어 부인과 아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잠시 베이징에 왔을 때 둘째 두범을 얻었다.
하지만 독립운동 집안의 길이란 고난의 길이었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1942년에 아들 두범씨가 사망했다. 수범씨는 19살에 한성상업학교 졸업 이후 돌아가신 아버지의 족적을 좇기 위해 북만주로 향했으나 그 사이 신수범 선생의 친구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박자혜 여사도 작고했다. 박 여사는 소식이 닿지 않아 도착하지 못한 아들이 오기도 전에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져 묘소도 없다.
이후 단재 후손의 삶은 여느 독립운동가의 가정처럼 어렵기 그지없었다. 특히 단재는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신수범 선생의 신변도 안전하지 않았다. 신 선생은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의 도움으로 몇 번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후 신수범 선생은 고철장사에 넝마주의, 부두 노동자를 전전하며 이승만 정권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잠 자다가도 아버지 단재 선생의 이야기만 나오면 뛰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디스크와 심장판막으로 1991년 작고했다.
이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유족은 신수범 선생의 부인인 이덕남씨(62)와 그들의 자녀인 두 남매가 남았을 뿐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포괄적인 독서와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한 순간도 독립 의지를 잃지 않았던 민족의 혼이었다. 123년(한성순보를 기점으로) 한국 언론사에 단재 선생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언론인은 없다. 또한 사학 연구에 있어서도 수많은 이들이 일제의 실증사학 등에 머물러 있을 때 당당하게 역사의 주체가 우리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뤼순감옥의 차가운 바닥에서 숨을 거둔 지 70년이 지난 지금 단재가 조국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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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조창완 기자는 미디어오늘에서 기자활동을 시작했으며, 99년 결혼과 더불어 아내가 공부하던 중국으로 건너와 지금은 3살 된 용우를 두었다. 글을 쓰고 방송을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으며, 한중교류의 다리가 될 여행사(www.aljatour.com)를 만들어 분전하고 있다. <알짜배기 세계여행 중국> <중국도시기행>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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