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
연변이 낳은 시성 윤동주
▲ 연전재학시절의 윤동주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로 응전하면서 절대적량심에 가닿으려도 분투한 시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은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종주의 유명한 “서시”이다.
이 시로하여, 아니 이 시와 견줄만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유명한 시로 하여 윤동주는 이미 조선문자를 알고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시인으로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가 윤동주에게 눈길을 쏟고 있다.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교의 교수 오오무라선생은 윤동주의 시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에 대한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이도 누구나 감동할만큼 탁월하다. 쉬운 표현, 잘리해할수 있는 시어의 구사, 동요와 동시적인데다가 문학적향기가 짙은 그의 시속에는 그의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이 그대로 녹아들고 스며들어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서시”, “자화상”, “별헤는 밤”같은 시는 세계적인 명시라고 나는 본다.
7월 6일, 기자가 윤동주선양사업일환으로 연길에 와 잠시 거주하고있는 윤동주의 친녀동생 윤혜원녀사와 오형범선생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 윤년사의 부군 오형범선생은 수두룩한 자료들을 내여보이는 가운데 윤동주가 9개월간 다닌적있는 일본 동지사대학교 교정에 세운 “윤동주시비”제박식자료를 손짚어주었다. 그를 죽음에로 몰라넣은 일본에서까지 그 시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연변의 아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7일), 위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 파평인 윤영석씨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선생의 누이 김룡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때 명동촌은 김약연 등 선각자들에 의해 이미 민족의 혼을 깨우쳐주는 교육운동의 보금자리로 되고있었다. 1925년에 윤동주는 그 유명한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소녀시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인 인상이였지만 의연함과 씩씩함을 지닌 젊은이였다.
“오빠는 참 멋쟁이였습니다. 교복이 노란색이였는데 맞지 않으면 재봉틀로 스스로 고쳐입었습니다. 그보다도 항상 책속에 파묻혀있는 모습이 더 멋있었습니다. 오빠의 방 책상엔 언제나 아주 많은 책이 꽂혀있었는데 벌써부터 창작을 한거지요. 항상 등사기로 뭔가를 등사했는데 난 멋모르고 옆에서 등사되여나오는 종이를 받아주군 했습니다.”
고향 명동촌을 찾은 윤동주 녀동생 윤혜원녀사
(왼쪽 두번째)와 부군 오형범선생(왼쪽 첫번째)
윤혜원녀사는 연변억양이 다분한 말씨로 이렇게 말하면서 윤동주와 함께 지냈던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우린 여섯 살 터울이였는데 지금도 잠자리랑 잡아주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동생들을 특별히 사랑했던 윤동주는 항상 동생들을 앞에 세워놓고 노래를 배워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주기도 했다면서 윤녀사는 말한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후 윤동주는 대립자의 한족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더 다니다 졸업했다. 대립자소학교를 맞힌 윤동주는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가 룡정에 가게 되자 일가는 아예 룡정으로 이사해버린다.
룡정에 자리잡은곳은 룡정가 제2구 1동 36호였다. 그때의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적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2학년때에는 웅변대회에서 1등한적도 있다. 그는 수학도 자러했으며 특히 기하학을 좋아했다.
동급생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북경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에 가자 윤동주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에 옮겨앉게 된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페교되자 룡정으로 다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된다. 이 무렵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소년”지에 동주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비자루”, “거짓부리” 등 동요동시를 발표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시절
중학교졸업반이 되자 윤동주는 진학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가 의과대학지망을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문학에의 굳은 신념을 지녀버린 윤동주는 자기 고집을 꺾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끝내는 단식투쟁까지 벌리는 극한 대립을 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1938년 4월 9일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청운의 뜻을 품고 연희전문학교에 들어서게 되었다.
고향인 연변을 떠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윤동주는 세계문학과 접하게 되며 훌륭한 스승들에 의한 학문이 세계 그리고 민족의식의 드높은 고취를 받아안게 된다. 윤동주의 관심분야는 력사, 문화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에 걸쳐 다방면적이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모든 상황이 바뀌여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고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착취의 손길이 사처에 뻗치면서 연희전문학교도 영향을 피치못했다. 졸업이 코앞에 다닿자 윤동주의 생각은 무척 복잡해졌다. 진학, 시국에 대한 불안 등은 윤동주를 무척 괴롭혔다. 윤동주의 년보를 보면 1941년 5월이후 대표작이라 할 많은 작품들이 씌여져있다.
이 무렵 윤동주는 퍽 신중하고 과묵한 성품으로 독서에만 몰두하였으며 국내외 많은 문인에 심취해있었다. 독서와 더불어 그는 창작의 붓을 시들게 하지 않았다. 떠오르는 시상을 며칠 몇주일씩 묵혀가면서 갈고 다듬어 완전한 작품이 이루어졌을 때에야 필을 들어 써내려갔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다시 손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무언가 뜻깊은 것을 만든 것이 자필시집3부였다. 그것은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기 위한것이였다. 이 시집은 19편으로 묶어졌는데 1941년 11월 5일자로 “별 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어있었고 시집이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자로 되어있었다. 윤동주는 이 시집3부를 연희전문 영문과 교수였던 리영하선생과 후배였던 정병욱군 그리고 자신이 나누어가졌다. 시집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된 비교적 긴 제목이였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정병옥에게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리유를 이렇게 밝혔다.
“‘서시’가 되기전에는 시집이름을 ‘병원’이라고 볼일가 했네.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 아닌가?”그러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주었다.
이 시집을 받아본 리영하교수는 “슬픈 족속”, “십자갚 등 작품이 검열을 통과하기 힘들터이니 출판을 보류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충고를 주었다. 일본류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을 걱정해서였다.
후에 윤동주자신이 가졌던것과 리영하교수가 가졌던 시집은 행방이 묘연해지고 정병욱이 가졌던 시집이 어머니 장롱속에 깊숙이 감춰졌닥 결국 광복후 한국의 정음사에 의해 볕을 보게 된것이다.
일제감옥이 이슬 되었어도
1942년 26세의 윤동주는 드디여 일본에 건너가 도꾜 릿교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인의 굴욕을 안고 지배국에 건너가 학문을 탐구한다는 것은 고통이였으며 끝없는 자책과 죄스러운 마음에 시달리는 일상이였다. 그러한 일상속에서도 창작의 붓을 놓지 않았는바 “쉽게 씌여진 시”등이 이때에 창작되였다.
아울러 일제가 지펴놓은 태평양전쟁의 불길은 미국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한층 격화되였고 부상자와 주검이 실린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일본으로 들이닥치는통에 일본판도는 온통 불안속에 잠기였다. 다급해난 일제는 조선반도에서 징병제도와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40여만명 조선청년들을 전쟁의 희생물로 내몰았다. 그 광란적인 시국에 시작된 윤동주의 류학생활은 자연 고독과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여름, 연변에 돌아온 윤동주는 “앞으로 우리 말 인쇄들이 모두 사라질터이니 무엇이든,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시대적상황을 절박하게 느꼈는데 결과적으로는 윤동주의 예언이 적절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 디케다 아파트에 하숙을 정했다. 그는 변함없이 독서에 열중하면서 시창작을 정진시켰다. 륙첩다다미방에서 밤가는줄 모르고 추위를 이겨내면서 시를 쓰는 일이 그때의 윤동주의 일상이였다.
1942년 겨울방학에 집에 오지 않고 1943년 7월 14일, 도시샤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윤동주는 “교도조선인학생민족주의구룹사건”에 련루되여 갑자기 체포되였다. 뒤늦게 공개된 일본경찰의 사상범을 다룬 극비문서 “특별월보”에 따르면 일본경찰의 윤동주에 대한 조사기록은 “요찰인물”로 주목받고있던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의 중심인물이고 윤동주는 그에 동조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결국 두사람은 12월 6일 검사국에 넘겨졌고 해를 넘겨 1944년 2월 22일에 기소되였다. 재판은 분리 진행되였으며 3월 4일,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소위 윤동주의 범법행위란 피식민상태의 량심있는 젊은이로서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기 위한 당연한 자기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윤동주는 막연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일제의 법에 의해 처벌된 것이다. 결국 윤동주는 후꾸오까형무소에 송치되여 비인간적인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민족해방의 날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사인에 대하여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라는 것이 주되는 주장이다.
한줌의 재로 변하여 윤동주의 유해가 돌아오는 날, 그의 혈육들은 두만강변 조선의 상삼봉역까지 마중을 갔다.
장례는 3월초순,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에 치러졌다. 집앞뜰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는 연희전문학교졸업 무렵 교내잡지 “문우”에 발표되였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장지는 룡정동산이였다. 연변은 4월초에나 겨우 해토되는 까닭에 5월의 따스한 날을 기다려 가족들은 윤동주의 묘에 떼를 입히고 꽃을 심었다. 단오 무렵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둘러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목비를 해세웠다. 이렇게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에게 가족들이 처음으로 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이다.
불멸의 시인
윤동주의 첫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여나온 것은 1946년이다. 애초에 77부 한정판으로 연희전문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것이 7년이나 지나 비로소 해빛을 본 것이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시집이 출판되였다는 소식과 함께 있는 시고들을 다 가지고 오라는 기별이 윤일주로부터 전해오자 윤혜원녀사와 오형범씨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하교에 다닐 때 집에 가져다 두었던 세권의 습작노트와 수많은 스크랩과 사진을 챙겨갖고 서울을 바라고 떠났다. 도중 스크랩과 사진이 든 보따리는 잃고 습작노트만을 겨우 보전하여 가지고 갔다. 1948년 12월 31일, 초간본 시집에는 정지용의 서문, “서시”를 비롯한 31편의 유고작품,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시인 유영의 추도시와 강처중의 발문이 순서대로 수록되였다. 그후 1968년 간행된 증보판 시집은 5부로 나뉘여져있는데 1부엔 윤동주가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그대로 실었고 2부엔 도꾜시절에 쓴 시 5편, 3부엔 습작기의 작품, 4부엔 동요, 5부엔 산문 5편이 실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연변에서는 감감 모르고있다가 1984년 연변에 다녀온 한국 서울의 연세대학교 명예박사 현봉학씨로부터 처음 시인의 신상이 연변에 전격 소개되게 된다. 그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을 읽고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는 일본의 와세다대학교수 오오무라선생이 도꾜히비야의 한 다방에서 윤일주씨를 만나 룡정에 있는 윤동주 묘소가 있는곳의 략도를 그려받고 급기야 연변에 와 윤동주묘소를 찾게 되면서 불멸의 시인 윤동주가 완정한 모습으로 연변에 나타나게 되었다. 고향은 윤동주로 하여 진동을 받았다. 연변이 낳은 윤종주가 세계적인 시인인줄을 깜박 몰랐으니 그럴만도 했다.
1980년대주엽부터 윤동주는 해마다 한국에서 “사랑받는 시인”, “좋아하는 시인”의 으뜸으로 뽑히고있고 그 기세는 세계에로 물결쳐 나가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은 해마다 가장 잘 팔리는 책으로 되고 있다. 윤동주와 윤동주시를 연구하여 석사, 박사가 된 사람만도 이미 30~40명 된다고 한다.
“정본 윤동주전집”의 저자 홍장학씨는 “윤동주는 변절과 배신으로 신음해온 우리 현대정신사의 중심에서 민족적량심과 긍지를 상징해온 그리 많지 않은 인물중의 한사람이다”고 하고 있다. 연변대학 권철교수는 “윤동주의 시는 바로 겨레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격정을 담은 노래이다”고 했고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그의 시는 자아성찰과 뉘우침을 통해 부단히 진실로 복귀하여 그 존재론적고뇌를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의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올림으로써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예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을 일깨워준데 그 감동의 비밀이 있다...
문익환목사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를 회상하는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진다. 또 그의 노래는 백의동포의 수많은 어린이,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읊는바가 되었다. 아무튼 연변땅에 시심의 뿌리를 박고 자신의 결백하고 희생적인 자아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것들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제단에 자기의 젊은 몸을 조용히 바친 그 아름다운 시편들은 한줄기 밝은 별빛이요, 우리 청소년들이 삶의 거울이 될 것이다.”
“난 지금도 ‘이랬슴둥’, ‘저랬슴둥’하는 연변사투리를 곧잘 씁니다. 우리 연변사람입니다. 윤동주도 연변사람입니다.” 윤혜원녀사의 말이다.
그렇다. 윤동주는 자랑찬 연변의 아들-조선족시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연변시인만이 아니다. 윤동주는 이젠 세계적시인으로 세인들앞에 나섰다. 윤동주로 하여 연변과 우리 겨레는 이제 더 큰 긍지를 느끼며 자랑을 느낄 것이다.
연변일보 김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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