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자의 과학 이야기] 세균 잡는 은나노
▲ 나노 크기의 입자로 만든 반지 모양의 `나노링`.
주부 채점순(40)씨는 지난 설 대목에 L백화점 정육매장에 갔다가 한우가 ‘은나노’ 용기에 포장돼 팔리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은나노 용기에 담긴 고기의 선도는 설이 며칠 지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신기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전문가들이 사용하던 ‘나노’라는 용어는 이미 보통명사가 돼 세탁기, 냉장고, 화장품 등 일상용품에 파고들고 있다.
은나노는 은(Silver)과 나노(Nano)의 합성어. 나노는 10억분의 1을 나타내는 단위로 희랍어의 난쟁이(나노스)에서 유래했다. 은나노는 전기분해나 화학적 분해방법을 이용, 나노 단위의 미세한 입자 상태로 만든 ‘은 용액(콜로이드)’을 뜻한다.
가전제품에 있어서 은나노 열풍은 뜨겁다. 거의 모든 고가 가전제품 모델에는 은나노를 채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전자의 드럼세탁기에 적용된 은나노 기술은 최근 미 시사주간지 타임에 집중 소개되기까지 했다. 은나노 드럼세탁기는 급수관에 달린 은 발생 장치가 은판에 전압을 가하여 은이온을 생성시킴으로써 옷이나 물 속에 있는 세균을 없앤다는 원리다.
은나노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강점은 강력한 살균 및 항균 효과다. 은(Ag)은 650가지 이상의 세균을 죽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은은 오래전부터 여러 가지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우리 조상은 음식 소독을 위해 은수저를 사용했고, 미국 서부개척시대에는 우유를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유통에 은화를 집어넣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우주선 내의 정수기 시스템에 은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렇듯 신통한 물질로 여겨 온 은의 효능에 대해 현대과학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하나는 양전하를 띤 금속 양이온인 은이 병원균 세포막 인지질(세포막, 미토콘드리아, 신경섬유 등을 둘러싸고 있는 생체막의 주 성분)의 음이온과 결합해 세포막을 파괴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빛에 의해 바로 활성화되는 은이온의 특성 때문이다. 활성화된 은이온이 다시 안정화될 때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고, 이 에너지에 의해 은 주변에는 활성산소가 생겨 병원균 세포의 노화를 촉진시키고 단백질을 산화시켜 주변이 살균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으나 아직 완전한 메커니즘이 밝혀진 건 아니다.
최근 웰빙 바람을 타고 은나노를 이용, ‘살균·항균 능력이 99.9%에 달한다’는 가전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살균’은 ‘균을 죽인다’는 뜻이고, ‘항균’은 ‘균을 막는다’는 뜻이라면, 자칫 주부들은 ‘살균·항균 능력이 99.9%에 달한다’는 것을 ‘무균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물론 은의 강력한 살균 및 항균 효과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없다. 효과는 ‘99.9%’일 만큼 명확하다는 얘기다. 은나노 가전 제품에서 균이 죽거나 증식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은이 아닌 산소 때문이다. 은은 산소가 균을 분해하는 데 일조(촉매제 역할)할 뿐이다. 산소분자(O)가 은 표면에 닿게 되면 산소원자(아토믹 옥시즌)로 흡착되는데 이 산소원자가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을 산화시키면서 균을 없애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살균’은 은과 균이 직접 맞닿았을 때만 나타난다. 은나노 용기 표면에서 균은 죽어도 은과 직접 닿을 일이 없는 용기 내부의 음식물이나 세탁물의 균까지 ‘살균’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은나노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해서는 한번쯤 경계해야 하며, 맹신은 금물”이라고.
김형자 과학 칼럼니스트(bluesky-pu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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