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자료/유적·유물·사찰

화엄사-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사오정버섯 2008. 8. 12. 20:37

화엄사-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하였다하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워졌고 그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 도선국사가 또다시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 완성 하였다.
사찰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등 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로 꺽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金剛力士),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이문은 금강문과는 서쪽방향으로 벗겨놓는데 독특한 특징이다.

지리산은 말이없고, 칠불도 또한 설함도 없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도 없으니,
무심이랴야 백운과 함께 하리라


천왕문을 지나 다시 올라가면 보제루(普濟樓)에 이르고 이 보제루는 다른절에서는 그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에 이르는 방법과는 달리 루의 옆을 돌아가게 되어 있다. 절내에는 동·서 두 개의 탑이 사선방향으로 보이며 동측탑의 윗부분 보다 한단높은 더위에 대웅전이 있고 서쪽탑의 윗부분에는 각황전이 위치하고 있다.

 

 

 

 

화엄사 전경

 

 

 

 

 

 

 

 

 

 

명   칭   화엄사대웅전  (華嚴寺大雄殿) 보물   299호

 

 

 

 

 

화엄사 보제루(시도유형문화재 49호)

화엄사 보제루는 법요식 때 승려나 불교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강당 건물이다.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대웅전 앞 한단 낮은 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 쪽 창문은 7칸 모두 큰 두짝의 빗살문을 달고 그 반대쪽 5칸은 널판지문을 달았으며 좌우 양칸은 문을 생략하였다.

 

 

 

 

 

 

 

 

 

 

화엄사 금강문 

 

 

화엄사 국보 및 보물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35호)
명  칭 :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국보35호
분  류 : 석탑
수  량 : 1기
지정일 : 1962. 12. 20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호남 제일의 사찰답게 많은 부속 건물과 화엄사 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 화엄사 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 제300호)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국보35호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국보35호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국보35호

 

 

 

 

 

 

 

 

 

화엄사 영산회괘불탱(국보301호)
종   목   국보   301호
명   칭   화엄사영산회괘불탱(華嚴寺靈山會掛佛幀)
분   류   불화
수   량   1폭
지정일   1997.09.22
소재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   대   조선 효종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화엄사에 있는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11.95m, 폭 7.76m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보현보살과 사천왕상 등이 배치되었다. 화면 중앙의 석가불은 높다랗게 만둘어진 단의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으며, 마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손가락을 땅으로 향한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둥근 얼굴과 어깨에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주고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해 세련미를 더한다.

석가불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석가를 모시며 서 있다. 사천왕 중 2구는 그림의 하단에, 2구는 상단에 배치해 마치 네 모서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각 상들의 얼굴은 둥글고 커다란 눈에 작은 코와 입, 길다란 귀를 가지고 균형잡힌 모습으로 서 있다.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중간색을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며 채색무늬와 금색무늬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각 상들의 늘씬하고 균형잡힌 형태,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치밀하고 화려한 꽃무늬장식 등에서 17세기 중엽의 불화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화엄사 영산회괘불탱(국보301호)

(이사진 한장은 제가 못찍어 화엄사 홈페이지 사진을 올립니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12호)
종   목   국보   12호
명   칭   화엄사각황전앞석등
  (華嚴寺覺皇殿앞石燈)
분   류   석등
수   량   1기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   대   통일신라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12호)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12호)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12호)

 

 

 

화엄사 각황전(華嚴寺覺皇殿) 국보 67호

종   목 :  국보 67호
명   칭 :  화엄사각황전 (華嚴寺覺皇殿)
분   류 :  사찰건축
수   량 :  1동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제작시기 : 조선 숙종 25년(1699)부터 약 4년간

아래 보이는 건물이 각황전입니다

 

가운데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12호)  그리고 보이는 건물이 화엄사 각황전(華嚴寺覺皇殿) 국보 67호입니다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300호)
종   목   보물   300호
명   칭   화엄사원통전전사자탑
  (華嚴寺圓通殿前獅子塔)
분   류   석탑
수   량   1기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   대   통일신라시대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300호)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300호)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

 

 

화엄사 동오층 석탑(보물132호)

종목 : 보물 제133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 : 1기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대 : 통일신라

 

화엄사 동오층 석탑(보물132호)

 

 

화엄사 서오층 석탑(보물133호)
종목 : 보물 제133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 : 1기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대 : 통일신라

 

 화엄사 서오층 석탑(보물133호)

 

 

 

 

화엄사 동오층석탑/서오층석탑

 

 

화엄사 역사

 

백두산의 정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오다 다시 솟았다 하여 두류산이라 불리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 이 지리산에 여의주가 하나 있으니 그곳이 바로 화엄사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서기 544)에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서 온 연기스님에 의해서 창건된 천년의 고찰이다.

이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셔와 4사자 3층석탑(불사리공양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후 의상대사가 화엄사에 주석하시면서 문무왕 10년(서기 670)에 3층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면을 화엄석경으로 둘렀는데 이로써 화엄사는 대도량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어 나말여초에 화엄사에 주석하셨던 도선국사가 화엄사를 총림으로 키우니 이 때 개창이래 최대 규모를 가진 대총림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광종의 어명을 받은 홍경선사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중수 및 보수가 이루어졌고, 문종대(1047~1083)에도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으며 의상대사의 덕을 흠모한 대각국사가 화엄사에 주석했던 때도 바로 이 때였다.

그후 화엄사는 인종(1126~1146)때 정인왕사(定仁王師)에 의해 중수되었고 명종2년(1172)에는 도선국사비가 건립되었고 충렬왕(1313~1330)때 원소암(圓炤庵)이 중건되었다. 조선초인 세종 6년(1462)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8가람 81암자의 모든 당우와 보물들이 일시에 불타버렸고 인조 8년(1699)에 벽암선사와 그 문도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화엄사의 가람배치는 효종원년(1649)에 화엄사가 다시 선종대가람으로 승격된 직후 계파선사에 의한 장육전 중건(1699)부터이다. 장육전이 각황전으로 중건되자 숙종은 친히 각황전이라 사액하였다.

화엄사가 오늘의 대화엄사로 발전하기까지는 도광(導光)선사의 중창원력에 의해서이다. 도광선사는 대웅전 및 각 요사를 중수하는 등 퇴락한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지난 1995년에는 서5층석탑(보물 제 133호)의 보수공사 도중에 부처님 진신사리 22과와 성보유물 16종 72점이 발굴되어 화엄사는 선교양종 대본산으로서의 사격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
                  
                      
한반도와 만주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정립된 뒤 제각기 국력을 기르고 영토를 확장하여 중국을 비롯한 멀리 천축에서까지 문화와 문명을 수입하여 바야흐로 태평성국의 기틀을 다진 삼국시대의 중엽, 소백대간(小白大幹)의 남단에 우뚝솟은 두류산(頭流山 : 현 智異山)에 봄이 무르익어가는 삼월중순 무렵.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에 한창 바삐 일손을 놀리고, 동리에서 꼬마들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소꼽놀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꼬마들은 멀리 두류산을 향하여 합장하고 그들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조석으로 염불을 외던 대로 소리를 맞추어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선재할아버지는 밭 언덕에 쉬면서 꼬마들의 놀이에 눈을 던지며 미소를 지으면서 두류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박노인은 어제도 그제도 산 중턱 골짜기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한 그는 지금 또 안개마냥 골짜기에 번지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연히 보니 안개가 아니라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었다. 박노인은 필시 산중에 무엇이 있겠구나 하면서 마을사람 십여명을 대동하고 골짜기애 이르렀다.

계곡 겉에 움막을 발견하고 다가가니 움막 안에서는 낭랑한 목소리와 장중한 음성이 조화를 이룬 독경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은 발을 멈추고 귀를 모았다. 사실 마을 사람들로서는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다른 나라 사람이 읽고 있는 독경 소리를 알아들을 줄도 몰랐으며, 독경이 끝나고 잠시후 한 사문이 나왔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친 사문의 모습은 이들의 마을 십여리 떨어진 홍련사(紅蓮寺)라는 절의 스님과 어딘가 다른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얼굴 셍김세와 피부가 우리민족과는 전혀 달랐으며 가사를 둘둘 말아서 몸을 감고 있는 점이었다. 박노인은 사문과 합장한후 대화를 나눴지만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었다. 사문은 움막안에서 벼루, 붓, 종이를 갖고 나와 글로서 얘기를 주고 받게 되었다.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한문은 천축국에 유학온 양나라 스님에게 배웠고 백제국에는 연(?)이라는 짐승을 타고 비구니이신 어머니와 함께 날아서 왔다는 말에 마을사람들은 놀라는 기색을 하였다. “빈도는 바닷가의 절에 살면서 바다 속에 사는 연이라는 짐승과 친해졌지요. 이 연은 능히 공중을 날으고 바다 속으로도 헤엄쳐 가며 바다에 떠서 배처럼 다니기도 합니다. 빈도는 이 연을 교화하여 오계(五戒)를 주고 제자를 삼아 이곳에 까지 왔고 방금 읽던 경전은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 이렇게 필담을 나눈 후 사문은 저녁공양 거리를 준비하기 위하여 피리 비슷한 악기를 꺼내어 입에 대고 길게 세 번 불어대니 웅장한 소리와 함께 천년묵은 거북만한 연이 공중에서 날아오더니 사문 곁에 사뿐히 내려 앉았는데 그 형상이 머리는 꼭 용같고 몸은 거북이며, 몸 길이가 열자는 넘어 보이고 두 날개를 가진 짐승이었다. 박노인 일행은 숨을 죽이고 이 신기한 동물을 보느라고 노비구니께서 그들의 등뒤에 나와 서 있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연의 등에 사문이 앉자 노비구니는 바른손을 들어 번쩍들어 떠나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고 사문은 노비구니에게 합장하고 다음에 연의 목을 쓰다듬어 주고는 범어로 뭐라고 이르니 연은 곧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박노인 일행들은 감탄을 말하며 사문이 사라져간 남쪽을 향하여 합장을 하였다. 연을 타고 다니시니 연존자라 할까. 비연존자(飛?尊者)라 할까. 의논한 끝에 연기존자(?起尊者, 緣起尊者)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후 “우리 고을에 경사가 난거야. 부처님께서 태어난 나라에서 오신 스님께서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화엄경을 백제땅에 가져왔으니,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충만한 이곳이 바로 최고의 불연국토(佛緣國土)야”

몇 달이 지나고 연기존자도 우리말에 상당히 익숙해져서 이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향상되었고 박노인의 손자인 선재를 시자로 두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존자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나 예불할 장소가 마땅치 못했다. 움막에서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없다하여 박노인의 마을 사람들은 법당을 건립하고자 존자님께 간청을 하여 불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이룩된 건물이 요사(寮舍)겸 설법전인 해회당(海會堂)이고, 또 한해가 지난 다음해 가을에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인 법당이 낙성되었다. 바로 이해가 백제성왕22년 갑자세(서기544년)였다. 박노인은 존자에게 연기존자님이라고 부르고 있아오니 연기사(?起寺)라 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존자는 한참동안 침묵하여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며 “빈도는 본국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수지독송해 왔고 현재도 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수행을 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 창해를 건너 이 나라에 온 것도 화엄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니 華嚴寺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마을사람들은 “존자님께서 命名(명명)한 가람 이름에 이의가 없이 대찬성입니다. 화엄사, 화엄경, 화엄법문, 연화장세계라 이 나라가 연화장 불국토세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존자는 또 한마디 하는데 “ 이 산은 멀리 백두산의 정기가 줄곳 흘러 내려와서 이뤄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일컫는다니 좋은 이름이외다.”헌데 빈도가 이 산에 처음 닿았을 적에 삼매에 들어보니 문수대성께서 일만보살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하였으니 이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 임에 틀림이 없소. 그리니 만큼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택하여 지리산(智利山)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리하여 智利山 華嚴寺가 되었다.

연기존자는 박노인외 마을사람들에게 특별히 차공양을 했다. 처음 먹어보는 차맛이었다. 혀끝과 입안에 젖어드는 향내음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그윽함이 깃들어 있었다. “존자님, 이 차는 무슨 차 입니까 ?”
이 차는 작설차(雀舌茶)라고 하는데 빈도가 여기에 올 때 수십 그루의 차나무와 씨앗을 갖고와 이산 금방에 심어 났지요. 이 차는 불보살님께 올리는 귀중한 차 이지요. 이 차를 올린 후에 이렇게 게송하지요.

“깨끗한 맑은 물 감로수로 변하여 삼보님께 받잡노니 굽어 살펴 주옵소서”하고 염불, 독경을 한 후 내려서 빈도가 마시지요. 이 찻잔 안에 화엄법계의 무진법문이 들어있고 자비광명이 충만히 들어 있지요. 여러분 이 차를 드시지요. 이 마을사람들은 찻잔을 들어 불단에 올려놓고 게송을 읊고는 소원을 빈 다음 찻잔을 불단에서 내린 후 제자리에 각기 앉아서 흡족하게 차를 마셨다.

연기존자는 “빈도가 천축에서 제조하여 가지고 온 것이 조금 있어서 여러분께 차공양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빈도의 소원대로 화엄법문을 문수보살 도량에서 선양할 수 있도록 화엄사를 창건한 여러분의 불사동참 공덕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고맙기 때문이오. 여러분의 마음이 곧 불보살님의 마음이 아니겠소. 그래서 여러분께 차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그윽한 차 향기는 화엄사 골짜기를 맴돌고 연화장세계에 가득가득 퍼졌다. 연기존자는 화엄법문을 들려주는 것과 차공양으로 마을사람들의 노고에 보답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존자의 위덕과 효심과 무궁 무진한 법문에 감화를 입어 어느덧 신심이 지극한 신도로 변해 갔다.

그리하여 화엄사에 도인이 계신다는 소문은 날로 펴져서 널리 알려졌으며 연기존자는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삼아 문수대성의 명호를 날마다 십만송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고 그를 찾는 청신사 청신녀에게 문수보살의 위덕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두류산으로만 불러오던 것을 방방곡곡에서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으로 여기고 지리산이라 부르는이가 많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수보살은 과거 7불의 스승이라 하거니와 지혜가 가장 뛰어난 분으로서 일체보살중에 상수(上首)의 위치에 있는 보살이시며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므로 사람들은 때로는 지리산을 청량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연기존자는 이따금씩 연을 타고 지리산의 여러곳을 두루 살피기도 하고 더러는 며칠씩 묶고 오는 일도 있었다. 존자는 이산의 주봉을 반야봉이라 이름 하였으니 반야(般若)란 지혜요, 문수를 일컬음이다. 이 주위가 팔백리나 되는 웅장한 산이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이라면 이 산의 주봉을 반야봉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면 산 그대로가 바로 문수의 몸이 아니랴? 수천척 높이의 봉우리가 수백도 더 되는 우뚝한 산 전체가 그대로 문수대성의 진신(眞身)이요 본면목인 것이다. 존자는 반야봉에 조그만 토굴을 하나 짓고 이름하여 묘향대(妙香臺)라 하였는데 문수를 한역을하면 묘수(妙首),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祥) 등이 된다. 다시 말하면 문수의 체(體)는 바로 묘유(妙有)라는 것으로 향상 변함이 없는 자성(自性)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이 묘유를 묘향(妙香)이라 일컬은 것이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義湘)스님은 유학길을 포기한 원효(元曉)스님에게 자기가 화엄학에 통달함을 자랑하고 싶어서 화엄경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더니 원효스님은 막힘없이 답변함에 의상스님은 놀라고 말았다. “화엄학(華嚴學)은 해동(海東)에서는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원효스님은 어떻게 화엄학에 대하여 통달을 했을까” 하고 생각하며 “ 스님 소승이 당나라로 유학하여 화엄학을 전수받고 인가(認可)를 받은 사람은 저 뿐이고 해동의 화엄학 시조(始祖)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스님은 화엄학에 대하여 달통하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132여년전 백제국 구차례(求次禮: 현재 구례)라는 곳 두류산(지리산)에서 범승(梵僧)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경을 설했다고 합니다. 두류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설법처(常住說法處)라해서 지리산이요, 화엄경을 설했다고하여 화엄사라고 합니다. 화엄사는 백두산의 혈맥과 섬진강의 태극이 합류하여 무한한 힘이 솟는 곳이지요.

고구려는 백두산의 힘. 백제는 백두산의 혈맥으로 강대한 힘을 얻었고 신라국은 혈맥이 없어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요.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갖고 화랑들은 지리산 세속평정에서 무예를 닦으며 그 곳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백제 무왕때 우리가 그 곳을 차지했지요. 화랑도에게 무한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용맹스러움이 서라벌까지 전해지고, 이 소승도 화랑도 출신이라 화랑도에게 삼국통일의 염원을 심어주기 위하여 화엄사에 가 보았지요. 그 곳이 중국적인 화엄사상이 아니라 불타의 나라 천축에서 온 화엄의 도량인 것을 알고 감회가 깊었지요.

이국땅 백제국에서 화엄의 꽃이 피워 있을 줄이야. 등잔밑이 어둡구나. 의상스님은 지척에 천축적 화엄사상을 두고 위험을 무릎쓰고 멀리서 중국적 화엄사상을 배우고 있었다니 말입니다.”
“ 소승은 화엄사에서 화엄경의 이치를 통달하고 연기조사, 자장법사께서 거주(居住)하시던 해회당(海會堂)에서 화랑도에게 화엄사상을 설하며, 천차만별의 강물이 바다로 모이면 이름과 차별이 없어지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 하듯 삼국이 어디에 있는가. 한민족이 아닌가. 이렇듯 화암사상은 화랑도에게 원융무애한 힘을 줌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있지요.”

의상스님은 놀라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칭 화엄학의 시조요. 부석사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적인 화엄사상을 갖고 근본도량을 삼을 수 없다하여 문무왕 17년(677년)에 지리산화엄사에 오셨다.

“이곳이 바로 범승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의 꽃을 피었던 곳이니 부처님의 성지에 온 느낌이구나. 여기야말로 해동의 연화장세계로구나. 삼국인이 한 민족임을 실현하는 정신적 통일을 이루게 하며, 또 화엄사가 해동의 근본도량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화엄석경의 거대한 법당을 세우므로써 중생계를 연화장세계로 꽃피우게 위하여, 부처님의 화엄힘을 빌어 백두산의 혈맥 아래에 장육전(丈六殿) 법당을 건립하여야겠구나.”

장육이란 부처님의 몸(16자)을 일컬으며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한다. 2층4면7칸의 사방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黃金丈六佛像)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 화엄경은 팔십화엄(八十華嚴)으로 10조9만5천48자로 되어 있으며 옥돌에 새겨진 화엄경은 부처님의 화엄사상을 꽃피웠고, 지금도 그 석경(石經) 조각들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연화장세게의 화려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의상조사께서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어 화엄사상 선양에 전신의 노력을 기우렸다
화엄십찰는 지리산화엄사(智利山華嚴寺),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원주 비마라사(原州毘麻羅寺),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비슬산옥천사(毘瑟山玉泉寺),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 팔공산미리사(八公山美理寺), 계룡산갑사(鷄龍山岬寺), 웅주 가야협보원사(熊州 伽倻峽普願寺) 삼각산청담사(三角山淸潭寺) 등이다.

인도(印度)적 화엄사상은 연기존자께서 씨를 뿌려 백제 승려와 백제국에 화엄의 꽃을 피웠고, 또 다시 신라 자장법사에서 원효성사로 이어 의상조사로부터 화엄의 종풍(宗風)이 해동에 가득하여 연화장세계를 이루었다.
           
                
계파선사가 장육전 중건불사 대발원의 기도를 올린지 백일로 회향을 맞이하게 되었다. 계파총섭(桂波總攝 : 총섭은 승군을 통솔하는 중요한 직권)은 아침공양을 마치고 대중스님들에게 한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서 큰 불사를 이루려면, 복 있는 화주승(化主僧)을 내어 큰 시주자를 얻어야 하느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어서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승이라는 부촉이 있었다고 말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대중스님들은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사시(巳時)마지 때 대웅전에 두 항아리를 준비하고 계파스님이 “만일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스님이 있다면 산승(山僧)과 함께 장육전 중건불사를 각별히 의논할까 하는 바이오.”
산내 모든 대중들은 차례 차례 계파스님의 지시대로 시행하였으나 손에 밀가루 묻지 않은 스님은 없었다. 천여중 대중을 모두 시험해 보았으나 기대하는 스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더니만, 맨 나중에 시험해 본 공양주 스님의 손에 과연 밀가루가 묻지 않는 것이었다. 대중스님들은 일제히 공양주 스님을 향해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승의 중임을 맡겼다.

계파스님은 공양주 스님에게 “ 그대가 10년을 공양주로 일한 복력(福力)이 천여명 대중 중에서 가장 수승하기에 오늘의 시험에서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짐짓 시험한 것이 아니라 꿈에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대성께서 지시한대로 시행한 것이니 그대는 문수대성께서 선택하신 화주승입니다. 그러므로 대 시주자를 잘 얻어 장육전 중창불사를 이루도록 합시다. ”
공양주 스님은 공양을 짓는 수행만 했을 뿐 화주에는 전혀 인연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새껏 걱정허며 대웅전에 정좌(正坐)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문수보살)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 그대는 걱정 하지말라. 내일 아침에 바로 화주를 위해 떠나라.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시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용기를 얻어 대웅전 부처님께 절을 하며 ‘ 맡은 바 화주 소임을 잘 완수하도록 가호를 내리소서.’ 하고 일주문을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니 그의 앞에 남루한 옷을 걸친 거지 노파가 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노파는 자식도 없이 혼자서 움막에 사는데 절에 자주 올라와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곤 하였으므로 공양주였던 스님과는 아주 친근히 지내온 터였다. 화주승은 노파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거지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을 지어달라고 하랴 싶어서였다. 그러나 화주승은 간밤에 문수대성(文殊大聖)의 교시를 생각하고 노파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 오 ! 대시주이시여 ! 장육전을 지어주소서.” 이렇게 외치며 절을 계속 하였다. 노파는 처음엔 서로 익히 아는터라 농담으로 그러는 줄 여겼으나 스님의 진지한 모습에 아무 말도 못했다.

화주승은 하루종일 노파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시주 하기를 간청했으나 노파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화주승의 정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다가 이윽고 화엄사를 향하여 합장하고 대 서원을 발했다.
“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문수보살이시여 ! 가호룰 내리소서.” 이렇게 원력을 아리며 수십번 절한 뒤 소(沼)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의 일이었으나 이미 이승 사람은 아니었다. 화주승은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대경질색하여 그 길로 멀리 도망쳤다.

그후 오륙년이 흘러 한양성에 다달았다. 화창한 봄날 하루는 창덕궁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유모와 함께 궁밖을 나와 놀던 어린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공주는 화주승을 보자 반가워하며 달려와서 우리 스님이라면서 누더기 자락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 공주는 태어나서부터 한쪽 손을 쥔채로 펴지 않았다. 화주승이 꼭 쥐고 있던 그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공주의 손이 펴지는데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석자가 쓰여져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대왕은 화주승을 내전으로 불러 자초지조을 모두 듣고 감격하여 “ 오! 장하도다. 노파의 깨끗한 원력으로 오늘의 공주로 환생했구나. 그 원력을 이루어 줘야 말고.”하며 장육전 건립의 대 서원을 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라에서는 공주를 위해 장육전을 중창할 비용을 하사하였고 장육전이 완성되자 사액(賜額)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