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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사오정버섯 2007. 5. 25. 11:27

밀레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프랑스의 화가.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화가들과 달리 풍경보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 《씨뿌리는 사람》, 《이삭줍기》, 《만종》등이 있다.
 
원어명  Jean Francois Millet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주요수상  레종 도뇌르 훈장(1868)
주요작품  《씨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기》(1857) 《걸음마》(1858) 《만종》(1859)

바위에 앉아 있는 양치기소녀 / 밀레 작. 캔버스에 유채 35.9 x 28.3 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18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루브르미술관 소장)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18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주요작품 중 《씨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기》(1857) 《걸음마》(1858) 《만종》(1859) 등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을 끌었으며, 만년의 가작 《봄》에는 빛의 효과에 있어서 인상파를 예고하였다. 그 밖에 《우유 짜는 여인》 《저녁기도》 《실 잣는 여인》 《괭이 가진 남자》 《젊은 어머니와 아기》 등이 있고, 소묘와 판화 등의 작품도 많다.

 

장 프랑수아 밀레
출생 : 1814년 10월 4일
사망 : 1875년 1월 20일
출생지 : 프랑스
직업 : 해외 역사인물서양화가
기본정보
본명 Jean Francois Millet
수상내역
수상연도 수상내역
1868 레종 도뇌르 훈장
기타작품
구분 분류 년도 상세내역
미술 1859 만종
미술 1858 걸음마
미술 1857 이삭줍기
미술 1850 씨뿌리는 사람
미술 우유 짜는 여인
미술 실 잣는 여인
미술 괭이 가진 남자
미술 젊은 어머니와 아기
미술 저녁기도


 

                 '만종(晩鍾,angelus)' 1857, 캔버스에 유채, 55*66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저녁 노을이 지는 들녘에서 한 가난한 농부 부부가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 고 있다.
캐다가 만 감자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멀리 보이는 교회당이 정지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명화 '만종(晩鍾)'은 프랑스의 자랑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백화점 소유주였던 알프레드 쇼사르가 80만 프랑에 이 작품을 구입 해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한 후 한 번도 거래된 적이 없었던 '만종'은 값을 매긴다는 게 불가능한 보물이다.
그러나 작품이 처음 만들어진 1860년 당시 밀레는 물감을 살 돈조차 없는 가난 한 화가에 불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상 아르투르 스테반스가 그림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1000프랑을 지원한다.
이 1000프랑으로 탄생한 그림이 바로 ' 만종'이다.
이렇게 탄생한 만종은 100년 만에 80만 프랑 값어치를 얻었고 그로부터 또 10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보물이 됐다.
1000프랑을 지원한 것이 국부(國富)를 일구어낸 것이다.

루브르에 돌아오기 전 '만종'은 미국 아메리카 미술협회에 팔렸다.
프랑스 측은 국회와 행정부는 물론 모금활동까지 벌여가며 '만종'이 미국에 팔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부자나라 미국을 당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가 자존심이 상한 채 주저앉아 있을 무렵 백화점 재벌 알프레드 쇼사르가 미국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만종' 을 다시 사들인 것이다.
쇼사르는 이 그림을 개인 자격으로 소유하지 않고 루브르에 기증했다.
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쇼사르가 없었다면 '만종'은 지금쯤 미국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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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이삭줍기'와 더불어 많이 알려진 그림 중 하나다.
그림을 보면 하루 일을 마치고 농부 부부가 교회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그림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다.

농부 부부가 바구니를 밭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바구니가 감자씨와 밭일도구를 담은 바구니로 알고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바구니에는 씨감자가 들어있던 게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가 들어있다.
그 시대 배고픔을 참고 씨감자를 심으며 겨울을 지내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아기는 배고픔을 참지못해 죽은 것이다.
죽은 아기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만종'이다.
그렇다면 왜 그림 속의 아기가 사라졌을까?
이 그림을 보게된 밀레의 친구가 큰 충격과 우려를 보이며 아기를 넣지말자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넣어 그려 출품했다.
그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농촌의 평화로움을 담고있는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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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로 달리는 정말 달랐다.
밀레의 <만종>을 보면 누구라도 신성한 노동 후의 고요한 정적과 평화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고 꼬마 달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맛보았다.
그 불안감이 얼마나 집요하게 그의 뇌리에 들러붙었는지 달리는 오랫동안 그 까닭을 알아내려 했고, 그에 관한 책을 쓰기까지 했다.
그는 밀레의 <만종>에 그려진 감자자루를 어린아이의 관으로 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수십 년 후, 이러한 그의 투시력은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정확한 관찰이었음이 밝혀졌다.
루브르 미술관이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그 감자자루가 초벌그림에서는 실제로 어린아이의 관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현실 생활에는 서툴렀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삶에 대한 투시력을 갖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은 진실이었던 것이다.

 

 

이삭줍기  (The Gleaners) 1857, 캔버스에 유채, 83.5*111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밀레는 농촌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 그것은 선하고 정직하며 자연에 순응해 사는 민중으로서의 농민에 대한 믿음 이었다. 밀레의 농부들을 보노라면 어찌도 그렇게 무던하고 순박한지 경외심이절로 일 정도이다. 이 같은 농민상은 사회가 한참 산업화 되던 밀레 당시보다 한두세대 전인 19세기초 혹은 그 이전의 흘러간 시간속에나 존재하는 이미지라며 밀레의 농민상을 "시대 착오적" 이라며
비판하는 비평가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밀레가 꼭 의도적이거나 과거 지향적이어서 그렇게 그렸던것은 아니었다.
밀레의 대표작들을 보다보면 우리는 그 끝없는 지평선을 계속 만나게 된다. 지평선을 이토록 사랑한 화가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까닭에 밀레의 대지는 늘 조금의 미동도 없이 인간의 굳건한 믿음의 바탕이 되어 준다. 밀레의 지평선이 가장 인상깊은 작품은 아마도 (이삭줍기) 일 것이다.
세 사람의 여인이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고 먼 배경에는 커다란 추수단을 쌓느라 바쁜 사람들에 비하면 이들은 이 동네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당시 이 이삭도 함부로 주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고 한다. 가진자와 관과 이웃의 눈치를 살피며 이삭 줍기나마 감지덕지해 대지에 머리를 조아린 여인들,밀레는 이들을 일부러 지평선 아래 배치했다. 마치 이들로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선인 것처럼 그 지평선은 하늘로부터 그들을 분명하게 갈라 놓았다.이들은 철저히 대지에 속한 여인들이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그 선 아래로 허리를 숙여 묵묵히 자기 발 앞의 이삭을 줍고있다. 오직 땅은 정직하며 노동은 존엄하다는 것, 따라서 땅과 노동을 삶의 원천으로 삶는 인간은 그만큼 정직하고 존엄할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지평선이 밀레에게 준 제일 중요한 교훈이었다. "세상 모든것이 변해도 농민들의 삶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삭줍는 여인들>에서는 가난한 여인들의 모습이 경건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그림은 성서에 나오는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고, 훗날 예수의 집안 할머니가 된 룻의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룻은 모압 땅의 처녀로 그 나라에 이민 온 히브리 청년과 결혼했다. 남편이 죽자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왔고 여기에서도 시어머니를 잘 섬겼다. 룻은 너무나 가난하여 추수가 끝난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 살아야 했다. 며느리를 기특하게 여긴 시어머니는 부유한친척 보아즈의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락을 받아 내었고, 젊은 과부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여 충고도해주었다. 시어머니가 시킨대로 어느날 밤 얌전한 룻은 들에서 자는 보아즈의 발 밑에서 잤다. 부자 친척은 여인의 고운 마음씨와 행동을 알고, 그녀를 책임지고 후에는 결혼까지 했다. 이 룻이 훗날 다윗과 예수라는 훌륭한 인물들을 낳은 가문의 조모이다.
넓은 밭에는 높은 밀단들이 보이고, 허리를 굽혀 추수한 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열심히 줍고 있는여인들은 당당하고 경건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서서 허리를 구부린 여인이 시어머니 나오미같고, 분홍색 수건을 머리에 쓰고 분홍 토시를 낀 가운데 있는 여인은 시어머니의 권고로 고향에 돌아간룻의 동서 오르파 같다. 청색 모자를 쓴 젊은 여자가 룻일 수 있다.

 

 

 

양치기 소녀와 양떼,Shepherdess with her Flock(양치는 소녀)

1864, Oil on canvas, 32 x 39 3/4 inches (81.28 x 100.97 cm)

 

1864년 살롱에 [송아지의 탄생]과 함께 출품하여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해가진 가을의 황혼에 양치는 소녀가 잔광을 등에 받으며 혼자 서 있죠. 그녀는 아직 양들에게 귀로의 신호를 하지 않고, 기도하는 듯 고개를 갸울이고, 저 멀리 있는 교회에서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양을 지키는 개의 실루엣이 효과적이죠..

소녀가 약간의 오른쪽에 치우쳐 있는 점, 그 녀의 머리 부분과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의 선의 방향, 또한, 양떼나 경작지의 선이 지평선 위 중심에 집중되어 있는 일, 또한, 반대로 빛이 이 중심으로부터 구름을 뚫고 양들의 등을 건너 주위에 흩어지고 있는 일들이 장면에 원근법적인 거리감을 주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모델이 된 소녀의 얼굴은 밀레의 딸 루이즈를 그린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 그림 모두 해질 녘의 먼 지평선에 황혼이 물들어가고, 이 부드러운 빛을 받은 등장인물들을 비롯하여 볏단과 농기구, 바구니, 대지의 잡풀, 그리고 양들까지 평화롭고 조용하며, 매우 환상적이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삭 줍는 여인들의 진지한 노동은 경외감마저 들게 하며, 부부와 양치기 소녀의 경건한 자세는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신성한 노동을 담아내고자 고뇌하며 자신도 농민처럼 밭을 직접 일구면서 그림을 그렸던 가난하고 고집스러운 밀레의 '전원 예찬'이 바로 이 그림으로 승화된 걸작입니다. "노동은 신성하고 그 일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라고 부르짖지 않아도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875년 위 '이삭줍기'란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보잘 것 없는 농사일하는 세 여인의 모습이 지나치게 거만하게 표현되었다거나 '하층민 운명의 세 여신'이라며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밀레는 "나는 평생에 걸쳐 논과 밭 밖에는 본 것이 없는 사람이므로 나 자신이 본 것을 될 수 있는 한 솔직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표현하려고 했을 뿐이다"라고 담담하게 항변했다고 합니다.

세 그림 모두 화면의 2/3에 가까운 반 이상을 논이나 초원으로 안정감 있게 구성하였으며, 뒷배경이 되는 먼 곳의 풍경이나 하늘을 더 밝고 부드럽게 채색하였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 여자나 부부, 양과 소녀를 어둡고 무거운 색체로 크게 대비시킴으로써 놀라우리만큼 회화적인 정취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맑고 환한 햇빛과 들판을 배경 삼아 주인공들을 아주 단순한 윤곽으로 표현함으로써 다른 어떤 그림들보다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그림을 크게 보면 인물들의 움직임과 배치에는 계산된 리듬이 숨어 있어 화면 전체의 구성에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 세 여인 모두 같은 방향으로 삼각형 구도의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두 부부는 서로 마주하고 있고, 양들과 소녀는 모두 독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치밀한 구성이 농민의 건강한 노동을 극적으로 표현해주었습니다. 밀레의 '노동'에 대한 신념과 사랑은 20년 뒤, 빈센트 반 고흐를 거쳐 '인간과 노동'에 대한 희망으로 전해져 지금까지도 많은 화가의 그림을 통해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A Shepherdess

 

 

 

Couseuse Endormie

 

 

 

 

In the garden

 

 

 

potato planters

 

 

 

 

The Walk to Work

 

 

 

 

 The Bather(수영하는 사람)

 

 

 

 

           오후의 휴식 1866, 종이에 연필, 파스텔, 29.2*41.9cm, 보스톤 미술관

 

                          

                                                                씨뿌리는 사람

 

 

 

                                                               달빛아래의 양우리

 

 

                                  

 

                                                           다프니스와 클로에

 

 

                                                   거위를 지키는 소녀

 

 

 

                                                          그레빌의 낭떠러지

 

 

                        

 

                                                           海軍士官의 초상

 

 

 

 

                           

 

                                                             우유를 휘젓는 여인

 

 

                      

 

                                                       물통의 물을 옮기는 여인

 

 

 

                     

 

                                                           파르당 부인의 초상

 

 

 

                         

 

                                                      외제니 카노비유 부인이 초상

 

 

 

                     

 

                                                            건초를 묶는 사람들

 

 

 

                                                           봄(spring)

 

 

 

 

밀레의 약력과 주요 작품 
 
 
1814. 10. 4. 프랑스 노르망디의 근처 구루시에서 8남매 중 맏이로 출생.
1837.(23세) 고향의 근교 셀부르시에서 미술공부를 시작. 셀부르시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진출.
1840.(26세) 처음으로 살롱에 초상화 출품.
1841.(27세) 폴린느 오노와 결혼 후 파리생활 시작.
1844.(30세) 부인 사망 뒤, 고향으로 돌아감.
1845.(31세) 카트린느 르메르와 재혼한 뒤 다시 파리로 나감.
1848.(34세) 2월 혁명 발발. 살롱에 〈키질하는 농부〉를 출품, 르드뤼 롤랭이 구입.
1849.(35세)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에 정착. 농민들의 생활을 소재로 활동 시작.
1850.(36세) <씨 뿌리는 사람>,〈건초를 묶는 사람들〉을 살롱에 출품.
1851.(37세) 바르비종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계속적인 작품 활동.
1853.(39세) 크리미아 전쟁 발발.〈풀 베는 사람들의 식사〉를 제작. 모친 사망.
1854.(40세) <모이를 주는 여인〉제작.
1855.(41세) <접목을 시키는 남자〉를 만국 박람회에 출품.
1857.(43세) <이삭줍기〉를 살롱에 출품. 명성을 얻기 시작.
1859.(45세) <소와 농부>〈만종> 완성, <죽음과 촌부>는 낙선.
1862.(48세) <삽을 든 사람〉제작.
1863.(49세) <양치는 소녀> 제작.
1867.(53세) 만국 박람회에〈이삭줍기> <만종> <죽음과 촌부>등을 출품했고, 살롱에는〈제비를 돌보는 소녀>와 <겨울>을 출품하여 일등 상을 받음.
1868.(54세)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음.
1870.(56세) 독·불 전쟁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감. 이때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
1871.(57세) 11월, 바르비종으로 귀환.
1873.(59세) <봄〉제작.
1874.(60세) <그레빌의 교회〉제작.
1875.(61세) 1월 20일, 바르비종의 집에서 향년 61세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