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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옐친 (Boris Nikolayevich Yeltsin)

사오정버섯 2007. 4. 24. 15:04

보리스 옐친 (Boris Nikolayevich Yeltsin) 정치인
출생 - 사망 : 1931년 2월 1일 (러시아) - 2007년 4월 23일 (심장질환)
경력 : 1991년 독립국가연합(CIS) 결성
1990년 5월 ~ 1999년 12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1989년 소련인민대표대회 당선
1981년 공산당 중앙위원
1976년 스베르들로프스크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기본정보

본명 Boris Nikolayevich Yeltsin
가족사항 아내와 자녀 둘

경력

경력기간 경력내역
  ~   당 제1서기, 당 정치국 후보위원
1961   ~   공산당 입당
1976   ~   스베르들로프스크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81   ~   공산당 중앙위원
1989   ~   소련인민대표대회 당선
1990.5   ~   1999.12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1991   ~   독립국가연합(CIS) 결성

러시아의 정치가로서 급진적인 개혁논리를 주창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를 저지시키고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여 실질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러시아 우랄산맥 부근 부트카촌()
보리스 옐친 / 일본 시코쿠 고치 현.
본문

우랄산맥 부근 부트카촌() 농가에서 태어나 공업도시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성장하였다. 건축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 공산당에 입당, 1976년 스베르들로프스크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거쳐 198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M.S.고르바초프와 친분을 맺기 시작하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옐친은 그에 의하여 모스크바시 당 제1서기와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발탁, 일약 중앙정계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987년 당 중앙위원회에서 당의 개혁의지 부족을 비판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다 당내 보수세력에 의하여 정치국으로 밀려났다. 그 후 더욱 급진적 개혁논리를 주창, 수구적 자세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개혁에 필요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획득하였으며, 1989년 새로 구성된 소련인민대표대회의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의회 내에서 공산당 권력독점의 폐기를 주장하는 야당세력을 이끌어 오다가, 1990년 5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체제내 야당'에서 권력의 핵심부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선 후 그는 “나는 소련의 주권과 15개 공화국의 평등 및 독립을 지지하며, 그것이 연방(소련)을 강화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991년 8월 19일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즉각 반()쿠데타세력의 선봉에 서서 소련 국민에게 저항할 것을 호소하며 총파업을 촉구, 60시간 만에 쿠데타를 실패로 끝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후 고르바초프의 권력은 급속히 약해지고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미온적인 개혁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그 해 12월 21일 발트 3국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을 참여시켜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고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공화국과의 CIS 주도권 싸움과 경제개혁의 실패, 군부의 반발 등으로 그의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92년 3월 러시아연방의 자치공화국들과 신연방조약을 맺고, 4월 경제개혁을 주도해 온 가이다르와 함께 내각 총사퇴를 표명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또한 보수파가 주도하는 인민대표대회와의 날카로운 대립을 12월 타협으로 이끌고 1993년 4월 25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결국 자신의 개혁의지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99년 12월 31일 건강문제와 후진 양성을 이유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하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쿠데타 맞서 민주주의 지켰으나…'실패한 대통령'

 

23일 사망한 보리스 옐친(Yeltsin·76) 전 대통령은 공산주의식 계획경제에서 시장 자본주의로 급변하던 시절의 러시아를 이끌었던 러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가 추진한 강력한 경제개혁 프로그램은 해외에선 호평을 받았지만, 실제 러시아 경제사정은 극도로 나빠졌고 국영산업들을 헐값에 민영화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그를 “러시아의 가파른 쇠락”을 이끈 인물로 기억할 것이라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옐친은 1931년 우랄산맥이 있는 예카테린부르크주 부트카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건축기사로 일하다가 196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8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이 됐고 이때 친분을 맺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서민형 지도자’를 자처하며 관료주의를 배격했고 줄곧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다 좌천을 당하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인기를 얻었다.

 

1991년 8월19일 보수 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진보세력들을 이끌어 반 쿠데타 세력의 선봉에 섰다. 첫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57%의 지지율도 당선됐다. 그러나 그 이후 그는 이 지지율을 한번도 회복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국정혼란, 심장병과 과음 등 건강문제에 시달렸다. 그는 1999년 12월 임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후계자 양성과 건강문제를 이유로 전격 사임했다. 그가 총리로 발탁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한 이가 블라디미르 푸틴(Putin) 현 대통령이다.

옐친 전 대통령은 1999년 퇴임 후 주로 전기(傳記)나 회고록 작업에 몰두해왔다. 그는 2000년부터 ‘대통령의 마라톤(The Presidential Marathon)’ ‘대통령의 노트(The Note of the President)’ 등을 펴냈다.

이후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저술활동을 중단했으며, 대신 기회있을 때마다 자신의 후계자인 푸틴 대통령의 대외정책을 옹호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지난 해에는 여러 러시아 언론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이 일방주의 외교를 펼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작년 2월 75번째 생일을 맞은 그를 크렘린궁에 초청, 생일파티를 열어주며 “옐친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가장 소중한 민주주의를 러시아 국민들에게 남겨줬다”고 말했다. 옐친의 정치 라이벌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이날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모스크바=권경복 특파원 kkb@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