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7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되었으며 농업담당서기(1978)와 정치국원(1980)을 역임했다. 그가 꾸준한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였던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견이 큰 역할을 했다. 유리 안드로포프의 통치기간 동안 눈부신 활동을 보였던 고르바초프는 1984년 2월 취임 15개월 만에 안드로포프가 사망하고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권력을 승계했을 때 이미 차세대의 지도자로서 부각되고 있었다. 1985년 3월 10일 체르넨코마저 급사하자 정치국은 최연소 위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고르바초프는 노쇠하고 무능력한 당간부들을 패기에 찬 신진관료들로 교체하는 등 집권 초기부터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첫번째 국내목표는 브레주네프 시대 이래 정체되어온 소련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하여 기술 현대화를 표방했으며 노동생산성 증대와 부패한 관료기구의 혁신에 힘을 기울였다. 피상적인 변화들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87~88년 경제 및 정치체제에 관한 더욱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소련사회 전반에 해빙 무드를 조성했다.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가 크게 확장되었고, 언론은 보도와 현실비판에 있어서 전에 없는 자유를 구가했으며, 정부당국은 스탈린주의 독재체제와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은 소련 최초의 민주화 시도였다. 복수후보자의 경합하에 부분적으로 비밀투표가 행해졌고, 시장경제의 요소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국가의 보조금과 모스크바의 지령에 의존해왔던 산업체들이 스스로 생산·자금·이윤을 관리하게 된 것은 실로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소규모의 가내생산과 개인영업도 용인되었다. 그러나 국가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는 관료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외교부문에서 고르바초프는 동·서 유럽 선진국들과의 우호증진을 통하여 통상무역관계를 발전시켰다. 1987년 12월에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대통령과 회동하여 '중거리핵전력협정'(INF Treaty)에 서명했으며 이듬해에는 9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1988년 10월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에 선출된 그는 경제개혁에 대한 공산당 내 반발 등으로 해서 입법 및 행정기구를 당에서 독립시킬 구상을 갖게 되었다. 1988년 12월 마침내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양원제 의회인 인민대표대회가 창설되었다. 1989년 3월 복수후보·직접선거의 원칙에 따라 인민대표회의 선거가 실시되어 5월에는 제1차 인민대표회의에서 진정한 대의기구인 최고 소비에트를 구성했다. 고르바초프는 최고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말부터 1990년 사이에 냉전에 종지부를 찍고 유럽의 정치구도를 변화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동유럽의 개혁주의자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이들 정권의 잇단 붕괴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동독·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에 민주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소련군은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1990년 여름에는 동·서독의 통일을 수락했으며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국제정치상의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민주화와 지방분권화로 자유의 기운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우즈베크 등 연방 내 공화국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 등지의 반소 소요사태는 명백히 분리독립운동의 성격이 짙었다. 중앙아시아의 인종분규를 유혈진압한 고르바초프는 1990년 3월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자 경제봉쇄를 통하여 이탈을 잠정 유보시키는 동시에 연방탈퇴의 법적 요건을 마련하기 위한 헌법개정작업에 착수했다. 민주화조치는 소련 공산당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그는 이 여세를 몰아 국가권력을 행정기구로 대폭 이관시켰다. 1990년 3월 인민대표회의에서 소련 대통령으로 추대된 고르바초프는 광범위한 행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인민대표회의는 헌법에 보장된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폐지함으로써 복수정당제의 법제화를 준비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전체주의 정치를 불식하고 소련에 대의제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데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계획경제의 요소를 일소하여 사기업과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는 데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그는 자유경제와 계획경제라는 전혀 상반된 두 체제 사이에서 절충을 모색했고, 그 결과 소련경제는 별다른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채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행정부가 취한 모순되고 자멸적인 개혁조치들은 경제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허물어져가는 공산당 지도자로서 새로운 법령과 개각을 통하여 사태의 수습에 안간힘을 썼지만 행정부는 이미 권위와 효율성에 있어서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대통령은 경제파탄, 민중의 욕구불만, 소수민족국가의 세력확장 등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보안기구와 당내 보수세력에 가까워졌다.
1991년 8월 19일 오랫동안 예견되어왔던 쿠데타가 일어났다. 크림 반도의 여름별장에 머물고 있던 고르바초프는 부통령인 야나예프, 국방장관 야조프, KGB 의장 크류츠코프 등에게 사임 압력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 가족들과 함께 연금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KGB의 사전검거를 면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공화국 대통령과 소프차크 레닌그라드(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됨) 시장 등 개혁파 인사들은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에 집결,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쿠데타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80만의 시민이 소련 전역에서 반쿠데타 시위를 벌였다. 21일 새벽 의사당에 대한 공격이 5명의 사망자를 낸 채 실패한 뒤 강경보수파의 쿠데타는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온 즉시 대통령직에 복귀하여 옐친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8월 24일 겸직하고 있던 공산당 서기장직에서 사퇴했으며 8월 29일 최고 소비에트는 지도부의 쿠데타 관여를 이유로 공산당의 활동을 정지시켰다. 1,500만 명의 당원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최고집권자가 당수로 있었던 소련 공산당이 마침내 불법화되고 만 것이다. 쿠데타의 실패로 보수세력이 일소됨에 따라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세력균형을 바탕으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던 고르바초프의 입지가 대폭 축소되고 반쿠데타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한 옐친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미국은 군비축소나 경화부채(硬貨負債) 문제의 성격상 공화국보다는 연방 대통령과 관계를 가졌으면 했지만 독일의 경우 이미 개별 공화국 특히 러시아로 협상창구를 바꾸어놓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와 소련의 운명을 결정지운 것은 소수민족의 독립운동과 그 대안으로서의 연방조약안이었다. 일찍이 1990년 11월 초안이 공개된 신연방조약은 강제로 성립된 소비에트 연방을 합의에 따라 재구성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조약안은 소련의 국호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고 각 공화국의 주권을 강화했으나 조세와 관세제도, 은행·통화 제도를 중앙정부의 관할하에 유지함으로써 연방의 전반적인 해체를 방지하려고 했다. 획기적인 연방조약안도 소수민족 독립운동을 잠재우기에는 미흡했다. 발트 지역의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아예 연방조약 협의에 불참했고, 조약 초안이 공개된 이후에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몰다비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가 신연방에 불참할 것을 선언하고 나섰다. 옐친은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권한확대를 주장하며 신연방조약안의 대폭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연방권한 축소의 주장은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유혈사태와 1991년 8월 19일의 보수파 쿠데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1월 14일 7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새로운 연방조약안에 합의했다. '주권국가연방' 조약안은 공화국에 독자적인 외교권과 군대창설권을 부여한 점에서 이전에 비해 연방권한을 훨씬 축소했지만 중앙집권적 명령체계를 갖는 통합군의 구성을 보장하고 핵의 중앙통제를 강조함으로써 연방정부의 핵심기능을 담보해 놓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그해말까지 신연방조약안이 조인되지 않으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배수(背水)의 진(陣)을 쳤지만 옐친은 러시아 연방공화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연방체제를 유지하려는 고르바초프의 노력에 제한적인 협조만을 보낼 뿐이었다.
1991년 12월 8일 벨로루시의 브레스트에서 회동한 옐친과 우크라이나의 크라프추크 대통령, 벨로루시의 슈슈케비치 최고회의의장은 민스크를 행정수도로 하는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 연방해체를 막아보려는 고르바초프의 노력에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12월 21일 알마아타에서는 1992년 1월 1일부로 독립국가연합을 발족시킨다는 전제하에 그루지아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이 협정안에 서명했다. 1922년 스탈린에 의하여 강제 구성되어 69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사임연설이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국에 방영되었다. "나는 이제 우려뿐만 아니라 인민 여러분의 지혜와 의지에 대한 희망을 함께 지닌 채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나는 알마아타 합의가 진정한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고 개혁과정을 용이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나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金德千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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