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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조선 회화사

사오정버섯 2007. 2. 27. 22:25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약간 촌스럽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배운 작가 김홍도는 조선시대의 풍속화가였습니다. 서민들의 일상 생활을 그린 그의 그림을 봐도 그렇고… 사실은 고상한 낭만이나 우아한 예술성은 기대하지 않았죠. 하지만 그를 알아가면서 느꼈던 것은 이 땅의 화가들 중에서 김홍도 만큼의 여유와 풍류를 가진 예술가가 정말 드물다는 것이었죠. 화가 김홍도. 그는 가슴에 신선을 품고 살았습니다.

1745년 영조 21년에 평범한 중인 가정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김홍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어느 누구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재적 능력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인지, 10대부터 그의 능력은 인정을 받았답니다. 지난 회에 소개해 드렸던 화가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스무살이 되기 전에 도화원의 화가가 되었지요.

그의 평생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강세황에게 배운 것은 그림 뿐이 아니었습니다. 김홍도를 크게 아끼던 강세황은 그에게 시와 글도 가르쳤으니까요. 덕분에 김홍도는 여느 중인 출신의 화가들과 다르게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자신의 그림 곁에 쓰기도 했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그림 곁에 글을 써놓는 것이 진정한 문인의 풍류라 여겼거든요. 영화 “취화선”에도 글을 쓰지 못해 천대받은 장승업이 화를 내는 장면을 기억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주변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홍도는 눈이 맑고 키가 훤칠한데다, 용모가 빼어났다고 해요. 그리고 그가 쓰는 글이나 시를 보면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신선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거문고 연주도 수준급이었다고 하니, 김홍도는 화가라기 보다는 소위 예술인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진행되는 그림 사업에는 그가 우두머리가 되었고, 왕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도 몇번이나 책임자로 활동하게 되죠. 게다가 중인으로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벼슬길에 오르기까지 하는 데요, 첫번째 부임지가 바로 스승 강세황과 함께 근무하는 장원서였습니다. 그곳은 궁중의 화초나 과실나무들을 관리하는 곳이었으니 화가출신 관리가 일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겠죠?

그가 마흔 다섯살이었을 즈음에는 정조의 지시로 영남지방을 두루 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산하를 그리는 훈련을 한 후에 그는 일본 쓰시마 섬으로 가서 지도를 그려옵니다. 그리고 중국에도 다녀오면서 외국의 사정을 왕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화가로서, 조선의 백성으로서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만간에 화가 김홍도의 독특한 인생경험이 영화로 제작될 것이라고 하니, 자못 기대가 되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김홍도가 그린 것은 풍속화만이 아니랍니다. 아래에서 소개해드리는 것처럼 그의 그림 중에는 꽃과 나무, 동물 등을 그린 정물화와 금강산 등을 그린 산수화, 건축물이나 궁중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재연하는 그림, 삼강오륜 같은 책에 들어가는 삽화 그리고 절에서 다루어지는 불교화까지 실로 그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그림에 손을 댄 듯합니다. 그의 그림들 모두 많은 이들의 요청에 의해 그려진 것이니 그의 인기를 가히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렇게 많은 그림 주문을 통해 김홍도가 돈을 많이 벌었을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처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신선을 품고 살았던 사람인지라 돈이나 명예를 쫓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벼슬보다 더 좋은 자연 속의 삶>, <소나무 아래서 이야기 나누기> 등의 작품을 그리면서 삶에 대한 자신의 인생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그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흔 살의 나이에 죽을 때까지 화가 김홍도는 세상의 물욕이나 권력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여유와 낭만을 즐기며, 그리고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천하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 깊은 심사 자주 거문고 줄에 담아보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남아도 해가 될 뿐이며 / 부귀의 지극함도 거짓되고 수고로우니
어찌 산 속 고요한 밤 향 피우고 앉아 / 소나무 소리 들음만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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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아이 (1778) ]
위의 그림 뿐 아니라 김홍도가 그려낸 <풍속화첩>에는 “논갈이”, “대장간”, “고기잡이”, “빨래터” 등 일상 생활을 재미나게 그려낸 그림들이 있습니다. 북, 장구, 피리, 해금등의 가락에 맞추어 소년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네요. 다소 투박하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듯한 선의 터치가 등장하는 인물들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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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름도 (1778) ]
이 그림은 김홍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히고 있죠. 단오날 즈음 씨름판이 벌어진 광경을 반시계 방향의 재미있는 구성으로 그려내었습니다. 특별히 더욱 독특한 것은 다들 씨름에 집중하면서 둥글게 모여있는 데 왼쪽 아래에서 씨름에는 관심이 없는 듯 등을 돌리고 있는 엿장수 아이의 등장입니다. 여기에 그의 재치가 숨어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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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당도 (1778) ]
혼이 나서 눈물을 훔치는 아이를 가운데 두고 다른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있네요. 예전에는 오로지 양반만이 글을 깨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당에는 양반의 아이들만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홍도의 서당도는 모여있는 아이들의 더벅머리나 행색을 보니 중인계급의 서당인 듯 합니다. 아마 영정조 시대의 서당은 중인들에게도 열려 있었나 봅니다. 이렇듯 변화하는 사회상을 김홍도는 재치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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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아래 생황을 부는 어린 신선 (1779) ]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소나무 곁에서 새깃털 옷을 입은 어린 신선이 생황이라는 우리의 민속 악기를 불고 있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악기를 불고 있는 그의 모습에는 고요하면서도 처연합니다. 눈으로 소나무의 줄기를 따라가보세요. 어디쯤에 용의 머리가 숨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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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녀도 (1781) ]
임금님의 초상까지, 초상화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김홍도. 그가 그린 초상화 중 하나이지만 궁의 시녀를 그려낸 것이 재미있네요. 뭉뚝하게 표현된 시작된 붓의 터치가 날렵하게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맑고 투명한 색상의 선들은 그림 속 주인공의 아름다운 특성을 대변하고 있는 데요, 아마 시녀가 아니라 선녀를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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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 (1782) ]
찔레꽃을 찾아 모여든 나비들의 모습을 부채에 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풍속화가로 다루어지고 있는 김홍도이지만 위와 같은 정물화에도 상당한 기량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스승 강세황은 이 부채 그림을 보고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나비가루가 손에 묻을 듯하니 사람의 솜씨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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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원도 (1784) ]
그림의 제목이 김홍도의 호를 사용한 것처럼 위의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생활의 한 단면을 그려낸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그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불러 놓고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위에 적힌 시는 그의 친구가 지은 것이구요. 나무가 많은 집에서 친구들과 시를 읊고 악기를 연주하는 그의 풍류가 부럽게 느껴집니다. 조금만 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이런 낭만도 가질 수 있지 않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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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경대 (1788) ]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과 비견되고 있는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인 명경대. 그 또한 금강산 관광 후에 이 그림을 그렸는 데요. 정선이 실제로 경치를 마주하고 나서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림을 그린 것에 비해 김홍도는 자신의 감상보다는 실제의 모습을 중시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과장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금강산은 실로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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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서루 (1788) ]
이 그림도 김홍도가 금강산을 그린 <금강사군첩> 중 한 장면입니다. 지도를 그린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약간은 건조해 보이기도 합니다. 가로 43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의 작은 그림이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끼고 여유롭게 세워져 있는 죽서루의 모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작은 비단에 그려진 그림 속 풍경은 매우 넓고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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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맞아 지저귀는 까치 (1796) ]
봄에 핀 복숭아꽃 주변에서 까치들이 모여 지저귀고 있는 모습입니다. 맑고 깨끗한 색과 선을 사용하여 여백의 공간을 충분히 살리고, 그리 많지 않은 수의 까치와 북숭아 나뭇가지들을 그려낸 것이 신선과도 같은 그의 심성을 잘 표현한 듯 합니다. 이 그림처럼 그의 마음 속에는 물욕이나 권력욕과 같은 무언가를 가득 채우기 보다는 적당히 비워 있었습니다


 
혹시 그대가 어쩌다가
사랑에 지쳐 어쩌다가
어느 이름 모를 낯선 곳에 
날 혼자 두진 않겠죠.
비에 젖어도 꽃은 피고
구름가려도 별은 뜨니
그대에게 애써 묻지 않아도 
그대 사랑인 걸 믿죠.
저기 하늘 끝에 떠 있는 별처럼
해 뜨면 사라지는 그런 나 되기 싫어요.
사랑한다면 저 별처럼
항상 거기서 빛을 줘요.
그대 눈부신 사랑에 두 눈 멀어도 돼.
하늘의 박힌 저별처럼 당신의 아픔으로 묶여
움직일 수가 없지만
난 변하지 않을 테니
- 간주 중 -
작은 꽃잎위에 맺힌 이슬처럼
해 뜨면 사라지는 그런 나 되기 싫어요.
사랑한다면 저별처럼
항상 거기서 빛을 줘요.
그대 눈부신 사랑에 두 눈 멀어도 돼.
하늘에 박힌 저별처럼 당신의 아픔으로 묶여 
움직일 수가 없지만 
난 변하지 않을 테니
비에 젖어도 꽃은 피고
구름가려도 별은 뜨니
묻지 않아도 난 알아요.
그대 내 사랑인 걸
작은 꽃잎에 이슬처럼
저기 하늘 끝 저 별처럼
다시 해 뜨면 사라지는 내가 되기 싫어요.
변하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