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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 정족산 전등사와 나부상

사오정버섯 2007. 2. 22. 21:30

인천 강화 정족산 전등사와 나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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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79호약사전(藥師殿). 뒤로 보이는 소나무가 일품이다. ⓒ2006. 6. 18 한국의산천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온수리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서 381년(소수림왕 1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충정왕(忠定王)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간(印刊),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는 보물 제178호인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梵鐘)이 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改版)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

 

※ 팔만 대장경을 이곳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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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사로 들어가는 정족산성 동문 

이곳 매표소에서 전등사까지 약 250m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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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동문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 누각안에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梁憲洙勝戰碑)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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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장대

 

책장의 일종으로 불교에서는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윤장 또는 전륜장()·전륜경장()이라고도 한다.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전은 경장뿐 아니라 율()과 논(), 여러 고승들의 장소()도 함께 넣어 둔다.

 

"석문정통()" 탑묘지()에 따르면 사찰에 처음 윤장대를 설치한 것은 중국 양()나라 때의 선혜대사() 부흡 현풍()으로, 불도를 믿으려 하나 글을 알지 못하거나 불경을 읽을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공덕이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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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78호대웅전(大雄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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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맛 좋은 샘물과 뒤로는 범종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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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393호 범종(梵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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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목당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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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사 경내는 물론 정족산 온통 숲이 우거지고 푸르름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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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의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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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목당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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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족산 사고지로 오르는 길에 내려 보이는 전등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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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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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전 ,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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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79호. 약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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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전등사 바로 아래에 있는 "죽림다원"으로 아주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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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과 대웅전 처마의 네귀를 떠 받들고 있는 나부상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몇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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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부상 ⓒ2006. 6. 18 한국의산천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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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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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지탱해온 대웅전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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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전체가 노천 박물관인 강화도 유적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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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傳燈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 안에 있는 절.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전등사대웅전]

전등사대웅전(조선 중기), 보물 제178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전등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78호. 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양간록 樣間錄〉에 따르면 이 건물은 1605년에 일어난 화재로 일부가 불타버린 뒤 1614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 완전히 소실된 것을 당시 사승(寺僧)이었던 지경이 이듬해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621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한편 1855년(철종 6) 화주(化主) 규형(奎瑩)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되었다는 〈전등본말사지 傳燈本末寺誌〉의 기록과 지붕을 덮었던 기와의 명문 중에 1876년(고종 13) 효월화주(孝月化主)가 대웅전과 약사전의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조선 중기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3짝의 분합문으로 된 빗살문을 달았으나 옆면에는 한쪽에만 출입문 1짝이 있고 다른 면은 벽으로 막혀 있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처리했고 그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차례로 올려놓았는데, 귓기둥이 약간 위로 향하고 있어 귀솟음을 강조했다. 공포는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기둥 사이마다 짜올렸으며 앙서[仰舌]와 수서[垂舌]로 장식된 살미첨차는 끝부분이 밖으로 뻗으면서 강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조선 중기 사원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다포계(多包系) 양식으로 되어 있다. 기둥의 네 귀퉁이 위에는 추녀를 받들고 있는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한데 이 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즉 광해군 때 이 법당을 지었던 도편수(都片手)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가 불사(佛事)에만 전념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버리자 도편수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하지 않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법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는데, 기둥 위에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하여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또 머리 위에는 무거운 지붕을 얹어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을 배반한 여인에게 복수했다는 내용이다. 내부에는 고주(高柱)를 세우지 않고 평주 위에 대들보가 걸쳐 있으며 그 위에는 동자기둥이 받치고 있는 종량(宗樑:마룻보)이 설치되어 있다. 불단은 조각과 색채가 뛰어나며 그 위에 안치된 석가삼존불은 1761년(영조 37) 대연(大演)에 의해 개금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후불탱화는 화기(畵記)에 따르면 1880년(고종 17)에 유담(柔談) 대사의 화주가 조성했다고 한다. 그 양 옆으로는 목조 사자 등에 동판 업경대(業鏡臺)가 놓여 있는데 이는 황천 가는 길목에 두는 것으로 죽은 사람이 그 앞에 서면 이승에서 행한 선악 행적이 모두 비친다는 것이다. 불단 위에는 목조건축의 포작(包作)을 여러 겹으로 포개서 장식한 닫집을 마련했으며 그 아래로 용·극락조·연꽃 등이 여러 장식판과 함께 달려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색채가 선명한 단청과 비천문, 연꽃무늬 등이 조화를 이루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전등사약사전]

전등사약사전(조선 중기), 보물 제179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전등사 대웅전의 서북쪽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79호. 이 건물의 창건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지붕의 막새기와 중에 1896년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중수했다는 명문이 있고, 또 건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계단식의 기단 위에 배흘림으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로 공포를 짜올린 다포식 계통으로 되어 있다. 앞면에는 2분합의 빗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벽은 벽으로 막았다. 공포는 외일출목·내이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끝은 모두 앙서로 되어 있으나 평방을 사용하지 않고 창방 바로 위에 공포를 얹어놓은 점은 일반적인 다포식과는 달리 주심포(柱心包)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물 앞쪽에는 기둥 사이에 공간포(空間包)를 배치했으나 양 옆면과 뒷면에는 공간포 없이 화반(華盤)만 설치한 점도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내부에는 평주 양 옆으로 대들보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동자기둥이 받치고 있는 종보가 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뒤쪽 한가운데 있는 불단에는 석조약사불좌상이 놓여 있다. 천장은 역시 우물천장이며 그 주위에는 연꽃과 비천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전등사동종]

전등사동종(중국 북송), 보물 제393호, 높이 164cm, 입지름 100cm, ...
전등사의 종각에 있는 중국 북송시대의 종. 보물 제393호. 높이 164cm, 입지름 100cm. 몸체에 새겨진 '大宋懷州修武縣百巖山崇明寺紹聖丁丑歲丙戌念三日鑄鐘一顆'라는 명문에 의하면, 원래 중국 허난 성[河南省] 회경부 수무현 백암산에 위치한 숭명사에 있던 것으로 1097년에 주조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 중국 종이 어떤 경위로 전등사에 전해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말 군수물자 수집 때 강제로 빼앗겼다가 8·15해방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철제로 만들어진 종으로 우리나라 범종과는 달리 정상에 음통(音筒)이 없고 다만 2마리의 용이 서로 맞대고 있는 용뉴(龍 )가 달려 있으며 그 주위에는 복련의 연꽃무늬를 돌렸다. 어깨부분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려진 횡선대 사이로 9개의 화판(花瓣)과 팔괘(八卦)가 장식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몸체는 여러 개의 선으로 8개의 방형 구획을 마련하고 그 안에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완전하게 해독하기 어려우며, 명문에 종이 주조된 지방이나 절·연대·시주인·장인(匠人) 등의 이름이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 원나라 장인이 만든 고려시대의 개성연복사종(1346)과 매우 유사하며, 11세기 이후 특히 조선시대에 유행하게 되는 중국 종의 시원적인 양식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몇 개의 중국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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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동종(중국 북송), 보물 제393호, 높이 164cm, 입지름 100cm,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