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호적에 입적된 한국 토종식물
인동초, 익모초, 머위등 학명에 일본 뜻하는 ‘japonica’ 표기 일제 때 일본학명 붙여 국제학회 보고, 우리 식물 263종 일본식물 둔갑 |
익모초, 인동초, 머위, 자작나무, 오리나무, 느릅나무, 동백나무, 사철나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들 식물은 우리나라 곳곳에 살고 있는 우리 토종식물이다. 하지만 학명으로 살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
▲ (왼쪽) 익모초 (가운데) 인동초 (오른쪽) 뱀무
익모초의 학명은 Leonurus japonicus Houtt. 일본을 뜻하는 ‘japonicus’란 라틴어식 표현이 붙어있다. 생리통, 어혈, 냉, 대하 등 여성 질병에 효과가 높아 ‘어미(母)에게 이로운(益) 풀(草)’이란 이름이 붙은 이 식물은, 배아플 때 달여먹기도 했던 흔한 약초다. 전국 들판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우리 풀이건만 학명으로 보면 엄연한 일본식물이다. 뿐만 아니다. ‘겨울(冬)을 견뎌낸 뒤(忍) 꽃 피우는 풀(草)’이라 해서 절개의 상징으로 꼽혔던 인동초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난히 좋아했던 인동초의 학명은 Lonicera japonica Thunb. 일본을 나타내는 ‘japonica’란 말이 당당하게 붙어있는 일본식물이다. 학명으로 치면 역시 우리 것이 아닌 셈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머위, 자작나무, 오리나무, 느릅나무, 동백나무, 사철나무 등 무려 263종에 달하는 우리 식물에 일본학명이 버젓이 붙어있다.
발견장소, 명명자순 학명 정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선 우선 학명을 붙이는 방법부터 살펴야 한다. 식물의 학명은 국제식물학회(IBC;International Botanical Congress)가 정한 명명규약에 의해 붙여진다. 고려대학교 강병화 교수는 “식물이 속한 속명을 앞에 붙이고, 이어 발견장소를 주로 보여주는 종소명, 그리고 이름을 정한 명명자의 순으로 붙여진다”며 “명명자 이름은 생략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국립수목원 생물표본실장 이유미 박사는 종소명에 대해 “식물이 발견된 장소를 주로 사용했지만 최근엔 그 식물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나 특정인물을 기념하기 위한 말을 붙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 (왼쪽) 작살나무 (가운데) 실고사리 (오른쪽) 석잠풀
IBC 명명규약은 “학명은 2개의 이름을 붙이는 이명법(binominal)을 원칙으로 하고 라틴어 문법을 따라 속명은 명사형으로 종소명은 형용사형으로 붙여야 한다”고 돼 있다. 그 식물의 족보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익모초를 학명으로 풀어보면 ‘마틴(Houttuyn, Maarten)이라는 학자가 일본(japonicus)에서 발견한 익모초속(Leonurus)에 속하는 식물’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명에 라틴어를 쓰게 된 것은 생물분류법의 기초를 확립한 스웨덴 학자 린네(Carl von Linne;1707~1778)가 학명이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라틴어를 사용해 기틀을 잡았기 때문. 그렇다면 같은 일본을 나타내는 말인데 japonicus는 뭐고 japonica는 또 뭘까? 국립수목원 이유미 박사는 이에 대해 “성(性)에 따라 격변화를 하는 라틴어의 문법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 단어의 성에 따라 japonicus, japonica, japonicum 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된다는 얘기다.
일본학자 나카이 한국식물 총체분류
그러면 한국 식물에 일본 학명이 붙게 된 까닭은 뭘까? 이는 일제 때 최초로 우리나라에 근대 식물학이 도입된 탓이다. 한반도에서 식물의 형태분류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일본 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이다. 도쿄제국대학 식물학과 출신의 나카이는 1908~1952년까지 한반도 전역을 뒤지며 수천 종에 달하는 식물분포를 연구, 한국 식물분류의 기원을 세웠다. 이유미 박사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카이 이전엔 체계적으로 식물을 집대성한 한국인이 없었다”며 “우리나라의 1세대 식물학자들은 대부분 나카이의 제자”라고 말했다.
나카이는 체계적으로 한국 식물을 연구·정리해 국제학회에 보고했다. 그는 일본서 발견한 식물엔 japonicus, japonica, japonicum과 같은 일본 종소명을, 한국에서 발견된 식물에는 koreana, coreana, coreanum 등의 한국 종소명을 붙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을 뜻하는 ‘chosenia’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발견되는 식물에는 상당수 일본 종소명을 붙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우리 자생식물에 일본의 호적이 만들어졌다
▲ (왼쪽) 호장근 (가운데) 환삼덩굴 (오른쪽) 홀아비꽃대
하지만 한반도에서만 나는 특산식물에 일본지명을 종소명으로 쓴 경우는 없다고 한다. 이유미 박사는 “식물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분포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라며 “내가 알고 있는 한, 595종의 한반도 특산식물 종소명에 japonicus, japonica 같은 표현을 쓴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식물분류학회 김영동(한림대) 교수는 “한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는 식물의 경우엔 발견한 사람에 따라 일본 종소명을 붙일 수 있지만 오직 한국에만 있는 식물에 외국 종소명을 붙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광릉수목원의 최혁재 연구사도 “오직 한국에서만 나는 식물에 외국 종소명이 붙은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사람 이름이 한국 식물의 속명으로 쓰인 경우는 있다. 금강초롱꽃과 검산초롱꽃이 그것이다. 금강초롱꽃의 학명은 ‘Hanabusaya asiatica, Nakai’이고, 검산초롱꽃의 학명은 ‘Hanabusaya latisepala Nakai’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Hanabusaya’란 표현이다. 이것은 초대 일본공사로 조선에 부임했던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1842~1917)의 이름을 속명으로 쓴 것. 모두 일본학자 나카이가 붙인 것으로, 나카이는 도쿄식물학회가 발행한 ‘식물학잡지’ 1911년 4월호에서 “하나부사 자작의 공을 잊을 수 없어, 하나부사야(Hanabusaya)라는 이름으로 이 신발견의 세계적 진식물(珍植物)을 자작에 바쳐, 길이 그 공을 보존하여 전하고 싶다”며 명명 사유를 밝힌 바 있다
▲ (왼쪽) 삼지구엽초 (가운데) 히어리 (오른쪽) 복분자
금강초롱꽃, 일본공사 이름을 속명으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의 이름을 속명으로 쓴 것도 있다. 백합과 식물인 평양지모가 그것이다. 평양지모의 학명은 Terauchia anemarrhenaefolia, Nakai. 역시 나카이 다케노신의 작품이다. 나카이는 ‘식물학잡지’ 1913년 10월호에서 이에 대해 “미지의 식물이고 분명히 신속(新屬)의 가치가 있다”며 “백작 각하가 조선식물 조사의 필요한 바에 착안하여 내게 조사를 명하노니, (중략) 본 식물을 각하에 바쳐 길이 각하의 공을 보존하여 전하고자 희망한다”며 데라우치의 이름을 속명으로 사용한 경위를 밝혔다.
이유미 박사는 이에 대해 “Terauchia anemarrhenaefolia, Nakai란 학명은 현재 쓰이지 않는 것으로 안다”며 “그 식물이 없어졌거나 다른 식물로 인정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나라에 분포돼 있는 식물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나라의 학자가 먼저 발견해 신고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학명을 붙일 수 있다”며 “우리나라의 힘이 강했더라면 보다 많은 것을 우리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소나무의 영어 이름이 ‘Japanese Red Pine’인 것도 유사한 경우”라며 “학명이 아니라 영어이긴 하지만 한국을 상징하는 나무 이름에 Japan이 들어간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글=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
사진=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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