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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DalaiLama]의 궁전-포탈라궁(布達拉宮)

사오정버섯 2008. 3. 4. 22:52

달라이라마[DalaiLama]의 궁전-포탈라궁(布達拉宮)

 

중국 티베트자치구 라사 포탈라산 마르포리(붉은 언덕) 경사면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궁전.
“포탈라”란 <관세음보살이 사는 곳>의 와음(訛音)이다.
관음은 건국의 영주 송첸 감포왕 또는 역대 달라이로 화신(化身)하여 여기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현재의 궁전은 7세기에 송첸 감포왕이 지었다는 거성 자리에 달라이 라마 5세가 17세기 중기에 건설하였다

 

 

포탈라궁 (布達拉宮) Potala Palace
 
중국 시짱(西藏:티베트) 자치구의 주도(州都) 라싸에 있는  다라이라마의 궁전. 티베트 전통건축의 걸작으로서 훙산산
           (해발 3600m) 기슭에  요새 모양으로 지은 고층 건축군이다.
토번 (吐 蕃)왕 손챈감포가 축조하였다는 홍산궁전의  자리에  다라이라마가 5세가 17세기 중반에 건설하였다.
외관 13층, 실제 9층으로 되어 있고 전체 높이 117m, 동서 길이 360m, 총면적 10만㎡에 이르며 벽은 두께 2∼5m의  화강암과 나무를 섞어서 만들었다.
건물 꼭대기에는 황금빛 궁전 3채가 있고 그 아래로 5기의 황금탑이 세워져 있다.

 

 

 

 

 

 

 

 

 

 

 

 

 

아래그림 (제보:김영길/이천오님)

 

 

 

 

 

 

 

 

 

 

 

 

 

 

 

 

 

 

 

 

 

 

 

 

 

 

 

 

 

 

 

 

 

 

 

 

 

 

 

달라이라마 [DalaiLama]
이름 : 달라이 라마 (Tenzin Gyatso) 
출생 : 1935년 7월 6일
출신지 : 티베트
직업 : 승려
경력 : 전국 인민대표대회 티베트 대표
1959년 인도 티베트 망명정부 설립
수상 : 1994년 루스벨트 자유상
1994년 세계안보 평화상

[출생] 1935년 티벳고원 탁처 마을 출생 [본명]잠펠 가왕 롭상 예쉬 텐진 갸초[특이사항]티벳의 종교적인 지도자,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경력]1940년 득도식 14대 달라이 라마로 공식 취임, 1951년 17세의 나이로 친정(親政), 1959년 인도 망명 [저서]달라이 라마의 행복론(2001),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보인다(2002) 등-

달라이 라마의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중에서-★유연한 마음은 부드러움에서 옵니다. 부드럽다는 것은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눈, 생각, 마음이 열려 있으면 보는 시각도 바뀝니다. 시각을 바꾼다는 것은 보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에서 남의 자리로 옮겨 보는 것이고, 자기 눈으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Dalai-Lama)
티베트불교(라마교)의 가장 대표적 종파인 겔루크파[黃帽派]의 수장(首長)인 법왕(法王)의 호칭.1642년 이후 티베트 원수가 된 역대의 전생활불(轉生活佛)에 대한 속칭이다.초대 원수를 다라이 라마 5세라 하고, 1세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이 칭호를 붙인다.이 칭호는 제3세로 꼽을 수 있는 소남 �초(1543∼1588)가 몽골 토메토의 알탄 칸의 초청을 받고 1578년 칭하이[靑海] 지방에 갔을 때 받은 것이다.

 

그이름의 뒷부분 ‘�초’에 해당하는 몽골어가 ‘다라이’로서 ‘바다’를,‘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한다.제3세는 원래 데푼 대승원(大僧院)의 관주(貫主)인 활불이었는데, 선대인 겐둔 �초(1475?∼1542)가 겔루크파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대립하는 카르마파(특히 紅帽派)와 다투었기 때문에 같은 행동이 기대되어, 스스로 몽골 부족 사이를 유세하며 신자를 얻어야 했다.

 

그가 죽은 뒤 새로운 활불로 알탄 칸의 증손 윤텐 �초(1589∼1616)가 선출되자, 외국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노골적인 위협정책이라 하여 카르마파의 증오심이 확대, 군사적인 대결만을 남겼다.제5세 가완 로잔 �초(1617∼1682) 때에는 몽골정권에 큰 변동이 생겨서 겔루크파는 흔들리고, 소남 라프텐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은 새로 카르무크와 동맹하여, 결국 구시 칸의 군대를 티베트에 끌어들여 신샤크파 정권을 전복, 사실상 티베트의 정치 ·종교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1642년 다라이라마 정권이 수립된 후, 데푼 활불은 티베트 국왕의 신분과 간덴 좌수(座首) 위에 올라앉는 황모파 법왕의 지위를 얻었다.

제5세의 제자이자 섭정이던 상게 �초(1653∼1705)는 다라이라마의 국가 원수로서의 정당성을 《문수리근본의궤경(文殊利根本儀軌經)》의 예언을 인용 증언하며, 티베트는 원래 관음보살의 교화의 땅으로 정해져 있고, 다라이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하면서, 그 제1세를 총카파의 제자 겐둔 두파(1391∼1472)까지 거슬러올라간다는 주장도 추가 확인하였다.

 

연애시인인 제6세 찬얀 �초(1683∼1706)가 청(淸)나라의 간섭으로 폐위되어 베이징[北京]으로 연행되려 할 때, 일반 승려와 민중은 이에 저항하여 다라이라마에 대한 강렬한 신앙을 나타내 보였다.1750년 이후 청의 지배 아래서는 다라이라마의 선출방법이 흐트러져, 제9세부터 12세까지는 어렸기 때문에 권력투쟁의 희생이 되었다.

 

제10세는 난을 피해서 정권을 잡고 독립과 근대화를 꾀했으나 실패하였다.제14세는 중국군의 진주로 한때는 새체제에 복종하였으나, 그러나, 중국으로부터의 티벳의 독립을 위해 1959년 측근과 함께 인도로 탈출, 망명정권을 수립하여 티벳 독립운동의 선봉에 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국 공산군의 점령이후 14대 달라이 라마는 UN의 티베트 문제 개입을 호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조항의 협정안'이 중국 당국의 강요에 의해 강제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중국군의 동부 티베트 지역 탄압과 달라이 라마의 신변문제를 계기로 1959년 수도 라사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자 달라이 라마와 그를 따르는 티베트인들이 인도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티베트는 중국의 자치 구역으로서 중국과 동일한 체제로 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유재산이 몰수되거나 아주 소수의 사원만을 남겨 둔 채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대부분의 승려들은 투옥되거나 강제로 환속당했다.

이처럼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16세의 나이로 14대 달라이 라마에 즉위하고 UN에 티베트 문제를 호소했으나 엘살바도로만이 UN 총회에 티베트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는데 지지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받아들이지 않아 UN 총회에서 다뤄지지 못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협상하고자 하였지만 중국의 강압에의해 오히려 라사에 중국군 진주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17개 조항"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의 지도자들과 티베트 문제를 협상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아편이라고 믿는 당시 중국 지도자들의 시각하에서 또한 "티베트는 불교라는 독약에 물들어 있고, 중국은 이 티베트를 해방하기 위한 어머니 나라"임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티베트 점령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이후부터 지방에서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봉기가 계속되었고 1959년에 티베트에 유례없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티베트인들은 중국군이 달라이 라마를 납치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캄과 암도지방의 주요 라마승과 지역 지도자들이 중국 문화공연과 행사에 초대되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고통스러운 경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군이 3월 10일 달라이 라마를 경극에 초대하면서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의 안전을 더욱 염려하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중국군이 경호원도 없이 오라고 한 점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1959년 3월 10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가 중국 경극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블링카 궁을 둘러쌌다.

그후 며칠동안 중국이 티베트를 단념하고 완전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대중집회를 열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이 대규모 집회의 폭발적인 결과를 염려하면서 노블링카 궁 앞에 있는 수많은 티베트 군중들에게 해산할 것과 중국군의 노여움을 삭이고 폭력을 막기 위한 일환으로 중국군 장군에게 편지를 써 티베트인들의 희생을 막고자 하였다.

 

이때 상황을 달라이 라마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양측의 화를 식히기 위해 그리고 라사의 시민들에게 절제하도록 요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장군의 모든 편지들에 답장을 했다. 당시 나의 가장 시급한 임무는 비무장한 나의 국민들과 중국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사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전면적인 대치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중국군의 진압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자, 달라이 라마는 그의 국민을 보호하는데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인도로 망명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통계자료를 통해서 볼 때 당시 1959년 3월 10일 하루동안 시위에 참석한 티베트인들 중에 1만 5천여명의 티베트인들이 사살되었으며, 티베트인들의 민중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6,000여개의 불교사원 파괴와 12만명의 티베트인들을 학살하였다.

현재 티벳트의 망명정부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 기슭 다람살라에는 '작은 라사'로 일컬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다람살라에는 망명한 10만 여명의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으며 3만 여명의 티베트인들이 네팔과 부탄의 티베트 정착촌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죽음을 무릅쓴 티베트인들의 망명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중에는 중국에서는 티베트 교육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부모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 자식을 다람살라로 보낸 경우가 많다.

현재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티베트 언어, 역사, 종교, 문화 전반에 걸친 티베트 교육체계가 수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현지의 티베트 전통문화가 중국인들에 의해 사라져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티베트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1959년에 티베트 공연예술기관을 설립했고 한편으로 중앙고등티베트학연구소를 설립해 인도에 있는 티베트인들을 위한 대학으로 만들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생활방식의 핵심인 티베트불교의 방대한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200여개 이상의 사원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티베트 망명정부에는 14대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종교, 문화, 내무, 재정, 교육, 방위, 보건, 정보, 국제관계 등을 관할하는 행정부와 사법부로서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가 있고, 입법부로서 티베트 국민대표의회는 지역과 종파를 대표하는 4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뉴델리, 뉴욕, 런던, 파리, 제네바, 부다페스트, 모스크바, 카트만두, 캔버라, 도쿄, 타이페이 등에 티베트 망명정부 대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용출처:http://www.dalailama.or.kr/hom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