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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코(1791~1824)의 그림 세계

사오정버섯 2007. 3. 1. 11:36

제리코(1791~1824)의 그림 세계

 

 

노르망디 지역 루앙에서 출생하여 베르네와 게랭에게 그림 기법을 사사한 테오도르 제리코(T. Geri-cault)는 프랑스 회화의 아카데믹한 전통에 반기를 들며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며 축적된 말에 대한 격정적 애착은 그의 초기 그림들에서 잘 나타났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티치아노와 반 데이크의 그림을 모사하며 최초의 주목할 만한 작품인 '황실근위대 기병 장교'    (1812)를 제작했다. 여기에서 그는 말과 말 탄 사람의 순간적 자세에서 전해지는 전쟁의 격렬성, 색채의 생생함과 역동성을 잘 묘사했다. 2년 뒤에 그린 '부상당한 중기병' 역시 한 순간을 잘 포착하여 전쟁에서 패전한 병사의 비애감을 상상력 속에 잘 나타내었다.

 

1816년 이태리로 간 제리코는 1년 간 로마에서 머물며 고대 작품과 르네상스 화가들을 연구했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뻗어나오는 예술적 에너지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 결과 이 시절 제작한 '경마'는 다른 작품들에서와는 달리 좀 더 고전파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뒤는 바레와 들라크루아 등과 함께 식물원의 야수들을 데쌍했다. 이때부터 들라크루아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1819년에 제작한 대작 '메두사호의 뗏목'은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가 신고전주의의 선언이었던 만큼이나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기원을 열은 도화선으로 간주되어 왔다. 발표될 당시 무능한 프랑스 왕당파 정치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인해 이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젊은 화가들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결합한 참신한 방식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였다. 

 

유난히 말에 대한 습작을 많이 남긴 제리코는 결국 33세 때 말타기 중 낙마하여 말과의 운명적 삶을 요절로서 끝맺었다. 그림을 통해 나타난 그의 격정적인 낭만 성향은 동시대의 유명 낭만파 예술가였던 바이런, 샤테르통, 키이츠 등에 그 어떤 전범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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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호의 뗏목(1819)

 

1816년 7월2일 프랑스 군인과 이주민을 식민지인 세네갈로 이송하던 호위선의 기함 메두사호가 서아프리카 근처에서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었는데 구명보트가 넉넉하지 못해 149명의 남자와 1명의 여성 승객은 임시변통으로 만든 뗏목에 올라타야 했다. 보트가 이 뗏목을 끌기로 했으나 보트 속의 누군가가 밧줄을 잘라버리자 뗏목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며 끔찍한 비극이 13일 간 펼쳐졌다. 첫날부터 먹을 것이라고는 포도주 뿐이어서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뗏목 밖으로 내던져졌다. 거의 기력이 쇠잔한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미쳐버린 다른 승선지들에게 뜯어먹히었다. 7월11일 쯤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넋나간 유령이나 다름없는 15명 뿐이었다. 

마침내 수평선에서 구조선인 아르귀스호가 나타났을 때 살아남은 조난자들은 거의 발광상태에 빠져 있었다. 제리코는 이 난파 사건에서 표현할 여러 장면들을 상정해 본 결과 빈사상태의 조난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인 아르귀스호가 아득한 물결 저편에서 조그맣게 보이는 순간, 구조를 요청하는 필사적 모습을 그려야 할 극적인 장면으로 선택했다. 

 

뗏목에는 아직 스무명이 남아 있지만 다섯명은 이미 죽었거나 고통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림 오른쪽 파도가 높이 솟구친 곳에 나무상자와 술통을 딛고 선 수병과 흑인 혼혈아는 아르귀스호에 신호를 보내려 무진 애를 쓰고 있다. 돛대 근처에는 네 인물이 천막과 반 쯤 부서진 돛 그림자 안에 서 있다. 이들 중 외과의 사비니에게 범선을 가리키는 자는 코레라르이고 그 옆에는 이성을 잃은 조난자 한 사람이 냉소 띈 표정으로 망망대해를 넋 잃은 채 바라본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아버지가 자기 무릎 위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안고 있다. 그의 양편에는 시체가 각 한구씩 널려 있다. 

실제 인물들을 제외하면 이 그림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직업 모델이거나 제리코와 가까운 이들이다. 술통을 딛고 선 혼혈아는 조제프로 화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모델이다. 또 다른 모델인 제르팡은 화면 맨 왼쪽에 시체로 누워있다. 제리코의 조수인 자마르는 사비니 곁의 인물로 포즈를 취했고, 당시 애송이 화가였던 들라크루아는 제작 중인 이 대작을 보러와 감탄하며 아버지와 아들 아래 몸을 웅크리고 죽은 오른 쪽 인물의 모델을 맡아주었다. 파도에 휩싸인 듯 팔과 머리가 바다 속에 빠져버린 오른 쪽 하단의 시체는 제리코가 작품 전체의 균형을 고려해 뒤늦게 부랴부랴 그려넣었다. 빈사상태의 아들을 안은 노인의 얼굴은 황달에 걸려 누렇게 뜬 동료 화가 르브랭의 얼굴을 모델로 하였다.  

 

이 그림에서 제리코가 추구한 것은 극사실적 묘사가 아니었다. 그는 생생한 묘사에 치중해 과장된 장면으로 빠지지 않고 전통에 따라 도덕성이 담긴 충실한 역사화를 그리려 했다. 이런 의도는 그림에 내재해 있는 대각선으로 드러나며, 마름모꼴 뗏목으로 더욱 두드러진다. 이 대각선은 화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지르며, 시선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끌어 올린다. 제리코는 인물들을 미켈란젤로의 조각들처럼 처리해 힘찬 양감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 나타난 격렬한 동세, 강한 명암과 색채 효과 등 박진감으로 가득 차 있는 극적 요소들은 젊은 들라크루아를 감격에 떨게 했고, 그에 의한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 확립에 위대한 도화선의 역할을 했다. 여기에서 제리코가 젊은 세대들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보다 다비드류의 신고전주의 화풍을 대신할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이 비난도 함께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 미학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반발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그림은 프랑스에서보다 영국 등 해외에서 먼저 찬사를 받기 시작했다. 런던 등에서 유료 전시회를 통해 큰 돈을 벌은 제리코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오랜 친구인 드뢰 도르시가 6천 프랑에 구입해 외국 미술관들의 거액 구입 제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산 값에 5프랑을 더 얹은 6,500 프랑에 프랑스 정부에 넘겨 루브르 미술관 소장품이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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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근위대 기병 장교(1812)

 

제리코 가 21세 때 제작한 이 그림은 그가 평소 말에 관심을 두고 습작한 결과를 잘 드러내 보인다. 화필에서 느껴지는 그림 속 힘과 역동성은 다양한 색채와 함께 빛나면서 율동감까지 펼쳐 보인다. 이 점은 신고전주의에서는 보기 힘든 낭만주의의 새로운 회화적 요소이다. 이 작품을 통해 제리코는 약관 21세?nbsp;이미 화단의 주목받는 인물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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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솜에서의 경마(1821)

 

경마광인 제리코는 경주마의 스피드, 경쾌함, 경마장의 긴장감 넘치고 속도감 있는 분위기에 혹해 이 그림을 그렸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말들이 앞 뒷발을 크게 벌리고 뛰는 장면이었다. 후일 사진기가 발명된 후 달리는 말의 다리 위치를 사진 영상을 통해 슬로 모션으로 분석해 보니 네발이 어떠한 경우에도 제리코의 그림에서처럼 동시에 공중에 떠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네발이 모두 다 떠있는 것은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 뿐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제리코와 같은 거장의 실감나는 순간 운동 묘사 솜씨가 거짓으로 판증되는 상황에 봉착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진 판독결과에 대한 동시대 예술가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조각가 로댕은 이 그림을 보고, "내가 믿는 것은 제리코이지 사진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제리코가 그린 말이 더욱 더 실제로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실제로 본 것처럼 말들과 기수들을 그려넣은 제리코의 상상력을, 사진이 보여주는 단편적 진실보다 더 그럴 듯한 진실을 나타낸다고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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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배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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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여인(1819~1822)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천재와 미친 사람이 닮은 꼴이라고 여겼는데, 제리코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광인들에 대한 흥미를 많이 느껴 무려 열 점이 넘는 광인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친 여인의 표정 뿐만 아니라 미묘한 심리상태까지 완벽하게 포착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허름한 옷을 입은 노파는 무엇인가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데 섬뜩하게 충혈된 눈빛이 보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여인의 목에 두른 붉은 색 목도리도 광인들이 겪는 심리적 불안함의 고통을 반영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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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에 흠뻑 빠진 여인(1822)

 

제리코는 33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바로 직전인 1822년에서 1823년 경 정신과 의사이자 친구인 조르주의 부탁으로 미친 사람들을 화폭에 담았다. 당시 정신 의학계에선 광인들을 얼굴 모습과 골상학에 있어 특정한 유형을 보여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들의 얼굴을 초상화로 남겼다.

이 작품 역시 앞의 '미친 여인'처럼 도박의 편집증에 빠진 여인을 묘사하고 있다. 이 여인은 자의식을 드러내는 대신 자폐증의 세계에 갇혀 있는 듯 하다. 초점을 잃고 멍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정상인과 다른 광인(狂人)들의 심리적 불안과 망상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제리코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 도박과 술로 황폐해진 삶을 추스르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비하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내면세계에 깊이 침잠하여 현실감각을 잃은 낭만주의적 천재들을 대하듯이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이들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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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당한 중기병(1824)

 

'황실 근위대 기병장교' 그림에서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말과 패전 속에 부상 당한 병사의 교감상태를 절제된 역동성으로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쟁터를 용감하게 누비던 얼룩배기 말도 주인의 부상에 풀이 죽었는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주인과 같은 동선을 유지하려 얘써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 어떤 비애감이 그림 전체에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