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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사오정버섯 2007. 3. 1. 11:21

클림트가 추구한 여성상 '팜므 파탈'

 

 

퇴폐적인 에로티시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데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퇴폐적이란 비난을 서슴없이 가한 사람들은 잠시후 뒷골목 매음굴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 그의 작품에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이전의 예술가들이 그리듯 그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가? 어째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 속의 정숙한 여인, 혹은 유대 민족을 구원한 유디트는 금방 정사를 끝낸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팜므 파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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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1(1901)

 

19세기 말 대다수 예술가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팜므 파탈로 새롭게 태어난 클림트의 유디트는 분명 자신이 흠모하는 '여성성'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녀의 몽롱한 눈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태민족의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불타는 쾌락적인 욕망의 표출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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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에(1907~08)

 

바람둥이 신 제우스는 다나에의 매력에 푹 빠졌고, 황금비로 변해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일찍이 많은 예술가들이 이 소재를 자신의 작품속에 즐겨 다루었지만 클림트만큼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한 순간을 포착해낸 사람은  결코 없는듯 하다.. 

다나에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를 통치하던 아크리시오스의 딸이다.
아크리시오스 왕은, 딸이 낳은 아들한테 살해당한다는 예언을 듣고는, 남자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딸을 탑 속에 가두어 버린다.
하지만 다나에에게 반한 제우스는 헤라의 질투를 피하기 위해 황금 비로 모습을 바꾸어 다나에의 체내에 들어가 사랑을 나눈다. 그결과 태어난 영웅이 페르세우스였다.

 
자신의 성적 환상을 감추기 위해 신화의 주제를 즐겨 사용한 클림트에게 다나에 처럼 적당한 소재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에 이야기는 클림트의 성적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클림트(1862-1918)는 밀속 속에 감금된 다나에의 움직일 수 없는 상황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 정사각형 화면 전체에 다나에를 그려 넣었다. 어둠속에 내리는 황금비는 남자의 정자를 상징한다. 격류를 따라 흐르는 정자는 다나에의 체내로 들어간다.
웅크린 채 태아 같은 자세를 취한 다나에는 성적 황홀감에 빠져 있어 눈을 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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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맞춤(1907~08)

 

남자의 마른 입술이 빰에 닿아도 여자의 기다림은 끝나지 않는다.

기다림의 표현인듯 반짝이는 꽃과 별, 그속에서 여자의 마음이 기다림의 탑을 만들어 나간다.

이 작품이 풍기는 몽환적 분위기와 신비로운 에로티시즘은 우리에게 낯선 어딘가를 헤매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절벽위에서의 두 연인의 키스가 매우 인상적이며, 뒤로는 칠흙같은 어둠의 절벽이고 꽃밭이 가득한 저 절벽의 끄트머리에서 두 사람은 애절한 입맞춤을 나누고 있다.

 

에로스적인 사랑의 갈구를 보여주는듯 한데, 그 사랑의 앞날은 절벽처럼 컴컴하고 자신이 없다는 뜻일가?

 

어쩌면 바우어 부인과의 사랑을 그림으로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만약 염문설이 사실이라면).

 

클림트는 그의 아버지나 동생처럼 뇌일혈(심장발작등으로 초래되는 뇌혈관성 질환)로 죽을 것을 평생 걱정했으나 (그도 뇌일혈이 생겨 반신마비가 된다.)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독감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 에곤 쉴레는 그의 죽음을 그가 안치된 병원 해부병리과 지하실에서 그림으로 그렸으며, 에곤 쉴레는 클림트의 아르누보 양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화시켜 그림으로 그렸다.

클림트 사망후 얼마되지않아,  에곤 쉴레 역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클림트는 독신으로 생을 마감하였으나, 살아 생전에 14명의 사생아를 남긴다.

모델이 된 모든 여인들과 염문설을 뿌리고 다닌 덕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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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1907)

 

<입맞춤>과 함께 '황금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은 클림트에게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르 누보 특유의 물결 문양, 세모 속에 새겨진 눈, 다양한 무늬들로 구별되는 황금빛 일색의 그림은 마치 세심하게 만들어진 모자이크를 보는 것 같다.

장식이 지나치게 많아 소재를 압도해 버릴 위험도 없지 않지만 아델레의 우아한 모습은 그런 위험이 여기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과시하는 듯 하다..

 

특히 이 작품은 사연이 많은 그림이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의 블로흐 바우어 가족으로부터 약탈, 전쟁후 오스트리아 정부가 보관하여오다, 남은 가족의 조카 마리아 알트먼이 7년여의 법적 공방을 이겨내며 돌려받은 그림이다.

 

그리고 금년 6월, 화장품 재벌 "로널드 로더"가 후손들로부터 사상 최고가로 이 그림을 구입하였다.

그 금액은 자그만치 1억 3천 5백만 달러, 지난 2004년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피카소의 "파이프를든 소년"이 1억 416만 달러에 팔린것을 몇 천만달러를 뛰어 넘는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란 타이틀을 하나 더 달게 되었다.

 

클림트는 이 그림을 3년에 걸쳐 그렸으며, 화려한 문양과 색채 속에서 불가사의한 눈빛과 감각적인 입술을 가진 모습으로 바우어부인을 그려낸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부인이 어릴 때 사고로 불구가 된 오른쪽 손가락을 가리기 위해 왼손으로 감싸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러한 바우어부인에 대한 관심표명외에도 "입맞춤"을 비롯한 다른 작품에도 바우어부인을 모델로한것으로 알려져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미묘한 분위기를 불러 일으킨다.

그녀와의 염문설은 그냥 소문으로만 무성할뿐 확인된 바는 없으나 상류층 여성으로 클림트를 위해매우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었으며, 특히 에로틱한 유대민족을 구원한 "유디트"연작 씨리즈에 모델이 된것으로 인해 그와 정신적인 사랑만을 나눈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도 가진것으로 모든 이들은 추정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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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다 프리마베시의 초상(1912)

 

클림트의 열렬한 후원자 부부 딸인 아홉살의 소녀 메다는 두 다리를 벌린 채 한 손을 허리 뒤로 올리고 도전적으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의 뒤로 펼쳐진 공간에는 여러 색의 꽃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데 이는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나가려는 소녀적 환상을 암시하는 듯 하다. 아니면 화가의 '롤리타'적 애정관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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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쓴 여인(1909~10)

 

이 그림을 보면 왜 클림트를 미인의 숭배자라 하는지를 짐작케 한다. 왼쪽을 향햔 시선, 내려 뜬 눈, 차가운 표정.. 그녀의 얼굴은 모자와 머리, 목도리에 의해 가려졌지만 도발적인 죄악의 냄새를 감출 수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잠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육감적인 생기가 끊임없이 뿜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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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깃털 모자를 쓴 여인(1909~10)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채 담배를 꼬나문 여인은 분명 '팜므 파탈'적 캐랙터의 전형이다.

특히 모자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그림의 주인공이 여인인지 모자인지를  묻게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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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터 운트라흐의 집들(1908)

 

클림트 풍경화들에서는 원근법이 교묘하게 비틀려 있으며 빛의 방향조차 일정하지 않다. 단지 빛의 확산과 관조적인 정적만이 흐르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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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풍경

 

클림트의 '모자이크 양식' 풍경화 중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다. 모자이크처럼 작은 붓질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하나하나의 붓질이 전체 구성에 거슬리기는 커녕 잘 융화되어 절로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그림의 형식과 기법이 하나로 녹아 있는 이 아름다운 그림 앞쪽에 펼쳐진 초원은 세심하게 장식된 융단처럼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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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호수

 

단지 빛의 확산과 관조적인 울림만이 있는 독특한 분위기이다.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고요함은 인간의 행위나 동적인 에너지가 끼어들 여지를 아예 없앤다.
클림트 풍경화 대부분이 취하고 있는 정사각현 형태가 이 집요한 정적을 강조한다. 움직임과 방향성의 결여는 그림 속 풍경을 초시간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고 물리적 자연을 넘어선 영적인 자연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곳은 어떤 모습 인가. 숲 깊숙한 곳에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 수평선이 높게 잡힌 호수 표면에 반사되는 빛의 떨림. 캔버스 가득 펼쳐지는 초원에 피어 있는 꽃과 풀의 반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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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사람의 자취는 없이 자연 정경만이 펼쳐지는 풍경화들은 보는 이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힘이 부족하다. 풍경화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사람의 자취 적어도 '나' 라는 일인칭 자아에 의해 굴절된 풍경을 바란다면. 그래서 내면의 갈망과 외침이 뚝뚝 묻어나기를 바란다면 클림트의 풍경화는 분명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클림트의 풍경화를 그저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이 그림이 보여주는 풍부한 감수성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을 미리 닫아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도 클림트 특유의 감성이 펼쳐진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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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터호의 시골집

 

나무들과 관목 덤풀, 집은 형체가 불분명하여 신비한 느낌까지 준다. 전혀 사실적이지 않아 보이는 이 그림에서 오히려 현상 배후에 있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진실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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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머 城으로 가는 길(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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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있는 농가 정원

 

나무들과 관목 덤불, 집은 형체가 불분명하여 신비한 느낌까지 준다. 그래서일까.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풍경이 모호하게 뒤섞인 듯한 이 그림에서 오히려 사실적인 그림이 줄 수 없는 어떤 것. 현상 배후에 있는 실제 혹은 진실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이처럼 실재와 진실이 환기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 그림이 가진 완벽한 조화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실제와 진실은 결코 들추어서는 안 된다는 베일 뒤에 숨어 있는 이시스 여신상이 가진 의미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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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가 있는 정원(1906)

 

클림트의 해바라기는 고호의 그것과 다르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이글거림은 없다. 태양의 신 아폴론을 연모했던 처녀보다는 아폴론의 구혼을 피해다니다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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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her Child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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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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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E 1

그의 두 아이를 낳아준 "미치 짐머만"을 모델로 그린 그림인데 제목과 다르게 희망이 사라지고 악몽적 기괴함으로 표현되어 있다.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난 아이를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란, ‘운명의 여인’ 혹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인’이란 뜻입니다. 1912년 극작가 버나드 쇼(G. B Shaw)가 처음 사용한 이래로 오늘날에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나 예술적 경향 또는 그 대상이 되는 이미지의 총칭처럼 일반적인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중요한 예술적 소재나 문화적 관심의 대상으로 유행을 한 것은, 우리가 소위 세기말이라 부르는, 19세기말의 상징주의를 비롯한 데카당(decadent퇴폐파) 문학과 미술로부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