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호의 그림 세계
렘브란트와 함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인정받고 있는 고호는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깊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걸작으로는 수많은 자화상과 〈별이 빛나는 밤>, , , , 등이 있다. 생애의 마지막 3년 동안 제작한 작품들만으로 고호는 근대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의 발전, 특히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쌍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쌍 1점뿐이었다.
1872년부터 자신의 생계를 맡아준 유일한 혈육 테오와 간간이 교류하던 몇 안되던 친구들에게 쓴 편지들은 그의 목표와 믿음, 희망과 절망, 당대의 대중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고독한 예술혼이 일상적 삶의 경계선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해 나갔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후인 1891년에야 비로소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의 친척들이 소장했던 몇 점 안되는 작품을이 전시되어 그 작품성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졌다. 20세기에 들어서야 그의 진가를 알아본 다른 화가들에 의해 명성을 얻기 시작한 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의 드라마적 인생 스토리와 함께 시간이 갈수록 폭발적으로 증폭되고 있다.
구두(1886)
이 구두의 한짝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글픔을 버티는 모습"을, 다른 한짝은 "고난극복 후에 맛보는 기쁨"을 보여주는 듯 하다. 고호는 일상에 담겨져 있는 주제를 아주 좋아했으며 이 구두 그림을 통해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과 동질감을 표현하려 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그림을 본 순간, "그림이 말을 했다 (Das Bild hat gesprochen)!"며 예술의 '존재 폭로' 역할에 대한 자신의 예술철학관을 피력했다. 그후 이 그림은 단숨에 세계 인문학의 화두로 뛰어 올랐다.
별이 빛나는 밤 (1889)
아를에서 정신병동이 있는 생 레미로 옮겨온 뒤 그린 이 그림에서 고호는 아를 시대에 비해 조금 더 어두워진 색채를 구사하지만 보다 다이나믹한 필치로 그 어떤 묵시록적 환상를 펼쳐 보이고 있다.
별들의 운동이 화려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펼쳐지는 가운데 우주의 섭리에 따른 통일된 질서가 있음을 암시하는 밤의 장관을 우뚝 솟아 오른 측백나무와 대비시켜 고호적 서정성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르노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년 9월)
어두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강물에 드리워진 긴 불빛의 그림자가 두 연인 앞에 펼쳐지는 이 그림은 고호적 서정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아마 고호의 아를 시절에 흔치 않았던 푸근한 서정적 운치의 밤이었으리라
밤의 카페 (1888)
고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붉은 색과 초록색을 통해 인간의 소름끼치는 고통을 표현'하려는데 있다 했다. 고호가 테오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아를 시절 싸구려 술 압상트를 마시며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간간이 들렸던 카페 "드 라카사르"의 어느 밤시간 정경을 묘사한 걸작이다.
고호의 고달픈 생활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카페 내부 정경은 빨강, 초록, 노랑의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그 침울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밤의 요기속에 절절이 뿜어내고 있다.
밤의 카페 테라스(1888)
같은 시기에 그린 이 그림 역시 에서처럼 세파에 시달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찾았던 카페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고호의 그 시절 일상에서 밤이 낮보다 더 생기에 차고 발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비교적 밝은 색조를 많이 사용해 고호 특유의 우울한 음산함이 많이 배제되어 있다.
오베르의 교회 (1890년 6월)
목사가 되고 싶어했던 고호에게 교회는 항상 그 어떤 회한을 불려 일으켰음에 틀림없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진 오베르의 교회 건물에 고호는 젊은 시절 머물렀던 누에넨의 폐허 교회탑의 음산함 이미지를 덮어서 이 그림을 제작했다. 마치 불길한 순간이 조만간 자신에게 도래할 것임을 예견이라도 한듯이..
가세 박사의 초상(1890년 6월)
가세 박사가 테오의 소개로 찾아간 고호를 만났을 때 그는 62세의 지역 유지 의사로서 이미 도미에, 쿠르베, 피사로, 세잔 등 주류 화단의 변방에 머물던 소외된 화가들과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가세 박사의 이런 성향이 고호와도 잘 통해 곧잘 고호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우수에 잠겨있는 듯한 그의 표정은 고호의 초상 모델관에 딱 부합해 총 3점이나 가세 초상화를 남겼다. 그 중 이 그림이 고호가 평한 '우리시대 슬픈 표정'을 가장 잘 나타낸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까마귀가 나르는 밀밭(1890년 7월)
지평선이 넓게 이어진 밀밭은 사나운 폭풍으로 물결처럼 출렁인다. 거기에 까마귀 떼가 활개를 치며 나르는 불길한 분위기의 밀밭 정경을 그린 이 그림은 파랑과 노랑 그리고 검은색으로 이어지는강렬한 색조로 정신적 불안정 증상에 시달리던 그 무렵 고호의 심적 내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내 생활과 관련된 앞날의 전망은 매우 어두우며, 미래에 대한 일말의 낙관적 조짐은 현재로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고호는 절규하고 있다. 아마 자신의 권총자살을 필연으로 받아들인 체념이었을까..
화병에 꽂힌 12송이 해바라기(1888)
해바라기는 언제인가부터 고호를 연상하게 하는 꽃이 되어버렸다. 노란색으로 둘러싸인 불꽃같은 꽃잎이 고호라는 화가의 이글거리는 정열을 맞아 생명력있는 모티브로 만개해 버린 탓이다.
이 그림에서도 미묘한 톤의 푸른 색을 배경으로 변화무쌍한 노랑의 색조를 드러내고 있는 12송이 해바라기는 고호가 추구하는 강렬한 생명력의 본질 그 자체이다.
고호의 침실 (1888)
이 그림에서는 하나하나의 사물은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것들 서로의 관계는 뭔가 모순된 모습을 보여 제작 당시 고호의 불안한 내면세계를 엿보게 해준다.
우선 방의 크기가 분명하지 않다. 원근법에 의해 정면 안쪽 벽이 좁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관객들이 서있을 앞쪽보다 이상하리만큼 작다. 침대의 위치와 크기도 조금 애매하다. 두 의자와의 위치관계에서 보면 아주 길게도 보이고, 오른쪽 벽과의 관계에서 보면 짧게도 여겨진다. 정면 안쪽의 벽과도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바닥이 평평한지도 이 화면에서는 확신하기어렵다. 좌우의 문은 반쯤 열린 듯도하고 닫힌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어딘가 어긋나거나 비틀려 있는 점을 발견한 관객들은 이 그림에서 평화로운 휴식감보다 고호의 불안감과 초조함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릴 무렵 고호는 파리의 화가동료들에게 공동체 생활을 아를에서 같이 하자는 권유를 열렬히 했는데 이를 유일하게 받아들인 고갱이 온다는 소식에 다분히 격졍적인 고호는 불안과 기대에 들뜬 심리상태에 접어들었다. 바로 이 심리상태가 이 그림 화면에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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