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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

사오정버섯 2007. 2. 20. 21:38

명성황후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

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을 빠져나와 시내쪽으로 조금 들어가다보면 오른쪽에 명성황후 생가가 있다. 생가 한쪽에 공원과 함께 조성된 이곳 기념관에는 파란의 역사를 살다간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몇 점의 사료들과 함께 멀티미디어 장비를 이용하여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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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전시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이다. 비록 모조품이긴 하지만 그 칼의 칼집에는 '一瞬電光刺老狐(일순전광자노호;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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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귀를 읽으면서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을 보는 순간 눈썹이 파리하게 떨리는 건 기자만의 느낌일까? 김진명의 역사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과 드라마와 오페라로 재구성된 그때의 그 사건을 가슴 속에 그려보며 눈물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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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황후의 머리에 정갈하게 꽃혀 있던 그녀의 비녀와 그녀를 시해했던 날선 칼만이 우리 눈 앞에 있는가, 그때의 역사 또한 그녀의 시신과 함께 처참하게 능욕당하고 난자당하고 불태워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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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에 의하면, 문제의 이 칼은 그날의 새벽 48명의 일본 낭인중의 하나로 일본 황후를 절명시킨 토우 카츠아키의 칼이라고 한다. 그 낭인은 그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평결을 받은 뒤 '민비를 베었을 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번민을 하다가 이 칼을 쿠시다(櫛田 신사에 기탁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울분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두 딸들을 무참히 깔아뭉개고 무죄평결을 받아 자기 나라로 유유히 돌아간 두 병사와, 아시아를 환란에 빠트린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총리가 참배하는 뉴스의 장면 장면들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을 얘기하는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굴욕의 역사가 재연되고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본다.

안동희

 

 

‘명성황후 시해한 칼’ 일본 신사에 ‘보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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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본 자객의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쓴 칼, 후쿠오카 신사에

명성황후 시해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칼이 일본에서 공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공동의장 정념, 철안 스님) 간사 혜문 스님은 8일 “최근 명성황후 장례에 관한 기록이 있는 왕실의궤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의 실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스님에 따르면, 이 칼은 일본 후쿠오카의 ‘쿠시다’ 신사에서 보관중이다. 이 칼은 전체 길이 120㎝에, 칼날 부분이 90㎝ 길이이며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 있다.




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리우며 16세기 에도 시대에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으로 알려졌다. 스님은 “신사의 책임을 맡고 있는 켄노스케 궁사가 칼의 주된 용도는 전투용이 아닌 살상용이라고 말했다”며 “칼을 꺼내는 순간 방 안에 서슬퍼런 살기가 느껴졌다”고 느낌을 말했다. 칼은 메이지 41년(1908) 토오 가쓰아키란 자객이 신사에 기증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혜문 스님은 “켄노스케 궁사가 칼의 공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파장이 커지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었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사를 전공한 조광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인데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며 “시해 직후에 시해에 관련된 사람들이 일본으로 탈출했고, 이 당시 무기를 가져갔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또 “당시 일본의 문화와 정서로 봤을때 신사에 보관시킨 것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은 혜문 스님과 함께 방일 취재를 벌인 문화방송에서 오는 13일 밤 <시사매거진2580>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혜문스님은 “비록 칼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방송을 통해 일제의 만행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토오 가쓰아키는 누구?

토오 가쓰아키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문인 쓰노다 후사코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 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쓰아키, 나(데라사키) 세 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고 적어놓았다. 이 책에는 “나카무라 다테오가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쓰야키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라는 대목도 기재되어 있다. 토오 가쓰아키는 왕비의 침전으로 최초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킨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훗날 토오 가쓰아키는 그 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자료제공 : 조선왕조실록환수위



〈한겨레〉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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