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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례(高矢禮)’의 유래와 염제신농(炎帝神農)

사오정버섯 2007. 2. 17. 22:32

고시례(高矢禮)’와 염제신농(炎帝神農)

 불을 발견한 고시와 약초의 신 신농

 신농은 고시의 후손


우리는 농사의 신이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누구나 신농씨를 말한다. 그러나 신농씨는 농사의 신이라기보다는 약초의 신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농씨보다 훨씬 전인 「BC 3898년에 한웅천왕께서 신시를 여시고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주곡(主穀)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신시본기> 제3편에 나온다. 바로 여기 나오는 고시례가 바로 농사의 신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더 살펴보면 「이 때는 농사의 방법도 잘 갖추어지지 않았고 불씨도 없음이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산에 들어가니, 다만 교목들만 거칠게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앙상하게 말라 버린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침묵하며 말없이 보고 서 있는데 홀연히 큰바람이 숲에 불어 닥치자 오래된 나뭇가지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일어나면서 서로 부딪쳐 비벼대며 불꽃을 일으키는데 번쩍번쩍하고 불길이 잠깐 동안 일어나더니 곧 꺼졌다. 이에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돌아와 오래된 홰나무 가지를 모아다가 서로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다만 완전한 것이 못 되어, 다음날 다시 교목의 숲으로 가서 왔다 갔다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한 마리의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지라 고시씨는 크게 한 마디 외치면서 돌을 집어 던져서 이를 맹타했다. 그러나 겨냥이 틀려서 바위의 한 쪽에 돌이 맞아 번쩍하고 불을 냈다.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나더니 그 기술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부싯돌의 시작인데 지금우리가 부싯돌로 부르는 것은 이렇게 돌로 쳐서 불을 얻는 방법을 단군의 넷째 아들인 보소가 다시 재현하여 백성들을 습기와 추위로부터 벗어나게 했기 때문에 부소의 ‘부’자와 고시의 ‘시’자를 따서 부싯돌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전(少典), 소호(少嘷), 신농(神農)이 모두 고시의 방계”라고 하였으며 여기서 “신농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다”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한 “단군세기” 「단군왕검조」에 보면, 단군왕검은 무진 원년(BC 2333년) 도읍을 아사달로 옮기고 신시의 옛 규칙을 찾고 국호 배달나라를 조선으로 고쳐서 선포한 후에 고시를 농사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임명하여 농사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고시의 집안은 한웅천왕 때부터 단군왕검에 이르기까지 약 1,600년 동안 신시, 청구, 조선을 거치면서 농사를 관장해 온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농씨보다 훨씬 이전에 농사를 담당하던 고시씨는 신농의 조상이자 우리의 조상이었다.

 

우리가 음식을 먹기 전에, 특히 들판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음식을 조금 떼어내어 고시례라고 하면서 세 조각 정도 버린다. 이것을 두고 혹자는 음식에 따라온 귀신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도 하고, 들판에 있는 잡귀신에게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너무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다.

우리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고, 불로 이렇게 익혀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하여 주신 우리들의 조상인 고시(高矢)님에게 감사하다는 예를 표하는 마음에서 고시례를 하는 풍습이 생겼건만 지금에 와서는 왜 고시례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르고 재미로 고시례를 하면서 엉뚱한 소리들을 하고 있으니 조상님 뵙기가 죄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면 우선 신농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신농은 고시씨의 방계 소전의 아들로 몽산곡(蒙山谷)에서 태어나, 구룡천(九龍泉)에서 목욕하고 강수(姜水)에서 오래 살았다. 그가 강수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강(姜)씨가 되었다. 강씨의 마을은 지금 보계(寶鷄)남쪽 교외의 강성보 일대가 된다. 보계는 신농의 고향이다. 보계와 강씨족의 족보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면 신농의 후예로 8대의 수령이 대를 이었으며 <자치통감 외기(資治通鑒 外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신농의 계보를 보면 「 제1대 염제신농(炎帝神農)부터 시작하여 2대 제괴(帝魁), 3대 제승(帝承), 4대 제명(帝明), 5대 제직(帝直), 6대 제리(帝厘), 7대 제애(帝哀), 8대 제유망(帝楡罔)까지 426년이 신농의 나라가 존속한 기간이다. 신농이라는 호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임괴(臨魁:제2대 제괴)로부터 유망 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왜 고시례를 농사의 신으로 말하지 않고 신농씨를 농사의 신으로 보게 되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들이 모시는 신들은 대부분 중국의 도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전해졌다. 도교의 뿌리가 삼신 사상을 한웅천왕이 정립한 사상이건만 뿌리를 잃어버린 우리의 중(中) 조상들은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들며 중국의 사상을 으뜸으로 여겨 무조건 시시비비를 가릴 것도 없이 모든 신들은 중국에서 비롯되었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신농씨를 농사의 신으로 자기들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황제 헌원이 동이족(東夷族)에서 갈라져 화서족(華胥族)이라고 하였고, 하나라를 세우면서 화하족(華夏族)이라고 한 것이 지금 중국 한족의 시조이다. 그 당시에 황제 헌원과 같은 시대에 신농의 8대손인 신농 유망이 있었다. 신농 유망의 딸 뉘조가 바로 황제 헌원의 부인이다. 뉘조(嫘祖)는 양잠의 신이라 한다. 아버지 신농이 농사와 약초의 신으로 추앙되고 있으니 그 딸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누에를 치고 그 고치에서 비단을 생산해 내는 방법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러니 황제헌원은 유망의 사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위가 장인의 나라를 힘으로 정복하여 버림으로써 신농 계열이 황제헌원 계열로 흡수되어버렸다. 그러니 신농 유망의 조상인 염제신농도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이 농사와 약초의 신으로 추앙하며 조상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모화사상의 극치를 달리는 우리의 중(中)조상들이 중국을 따라 입으론 고시례를 하면서도 신농씨를 농사의 신으로 모시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심코 지나가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웅천왕 시절의 고시씨보다 훨씬 후세 사람인 황제 헌원을 중국의 시조라고 사마천이 <사기>에서 기록하였기 때문에 중국 역사의 시작을 황제 헌원 시대보다 더 이상을 올라갈 수가 없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니 황제 헌원보다 훨씬 이전에 농사를 관장한 고시씨를 인정할 수 없으며 또한 중화족의 전신인 화하족(華夏族)이 그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시씨를 농사의 신으로 도저히 모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시씨의 후손으로 염제신농의 8대손인 황제 헌원과 동시대에 살았던 염제 유망의 선조인 염제 신농을 농사의 신으로 추앙하게 된 것이다

 

염제 신농을 농산의 신으로 추앙하면서 중국학자들은 중국의 역사를 426년이나 늘렸다고 볼 수가 있다. 중화의 시조라는 황제헌원에서 훨씬 위로 올라가서 염제신농도 자기들의 조상으로 만들어 농사와 약초의 신으로 추앙하고 있으니 염제 신농의 조상을 또 자기들의 조상으로 만들기 시작하면 동이의 역사가 송두리째 중화의 역사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오랜 세월동안 정부와 학자가 머리를 맞대고 조금씩 계속 되어 왔건만 우리학계와 정부에서만 모르고 있는듯하다.

 

아니 우리는 상고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설화나 전설이기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 왜곡 및 잠식을 무관심, 모른척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사학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에 의하여 더욱 중국의 상고사 왜곡이 심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와 같이 지금 중국에서는 황제 헌원 이전의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로 편입하고 만들기 위하여, 그리하여 황제 헌원의 시대를 뛰어넘어 보려고 80년대부터 서서히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의 건립이다. 여기에 모셔진 중화민족의 세분 조상을 염황치라 한다. 염황치란 염제 신농, 황제 헌원, 치우천왕 세 분을 뜻하는데 황제는 행정의 신, 신농은 농사의 신,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둔갑시켜 이들이 중화민족의 삼조상(三祖上)이라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황제 헌원과 치우천왕은 탁록에서 74회나 전투를 하였다. 그 결과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치우천왕을 한족의 철천지원수라고 기록을 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네 조상이라고 이렇게 모시고 있으니 그 의도를 깊이 생각하고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나 본 중국의 유명한 민속학자들도 염황치 삼조에 대하여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이러한 역사의 왜곡을 위하여 얼마나 정부와 학계가 비밀리 조심스럽게 천천히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또 그는 치우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족의 조상으로 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받들고 있는 신농씨를 차인[茶人]들은 차 잎을 처음 발견하고 마신 사람이라고 하여 다신 (茶神)으로 추앙을 하면서 헌다를 하고 있다.

 

우리는 신농씨를 약초의 신, 의약의 신으로 받들지만 농사의 신은 신농의 조상인 고시례란 우리의 조상님이 계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하겠다. 농사의 신도 신농이라고 하면은 우리는 음식을 버릴 때 ‘고시례’를 하지 말고 신농례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의미도 모르며 장난스럽게 하던‘고시례’는 고시에게 예를 갖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시례 속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우치고 우리의 전통문화가 우리들이 미신이라고 업신여기는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아주 귀중한 민속자료가 된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의식들이 미신이 되었는가? 우리의 정신, 우리의 시각, 우리의 사상 등 우리의 정신은 모조리 버리고 외국인의 시각으로,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우리의 문화를 바라보면서 미신이라고 폄하하게 된 현재의 우리는 하루빨리 우리의 정신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나마 고시례를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고시례를 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고 상기하고 있다는 뜻도 되므로 우리는 절대 고시례를 잃어버리지 말고 계속하여 큰소리로 외쳐야겠다. 고시례의 의미를 알았으니 장난이라도 좋으니 제발 큰소리로 고시례!를 외치자. 그 외침 속에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상고사가 살아 있음을 훗날까지 전하여 올바른 우리 정신을 가진 사학자들과 위정자에 의하여 다시 우리 상고사를 찾을 때 이 고시례가 첫 단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