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거기 있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나리꽃은 거기 있어도 여름이 오면 얼마나 아름답게 꽃핍니까.
잡풀 우거지고 보아주는 이 없어도 주홍빛 꽃 한 송이 거기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이 비탈지고 그늘진 그곳을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먼 곳에 가 있다 해도
그대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궁벽지고 험한 그곳에 사람 사는 정겨움이 감돈다면
그대는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겨우 이런 곳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뻐하고 대견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대 거기 있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낮은 곳에 있어도 구절초는 가을이 되면 얼마나 곱게 핍니까.
외진 골짜기나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어도
함께 모여 이룬 가을 풍경이 얼마나 사람들을 평화롭고 고즈넉하게 만듭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힘든 일을 하며,
언제까지 이렇게 비천한 자리에 있어야 하나 생각하지 마세요.
그대로 인하여 그대가 있는 곳이 든든한 자태로 서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찬바람 부는 낮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나 생각하지 마세요.
가장 훌륭한 사람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힘든 일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 가장 당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그대로 인하여 그대가 있는 곳이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성벽의 맨 밑에 있는 돌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성곽이기 때문입니다.
그대 거기 있다고 스스로를 미워하지 마세요.
외딴 늪도 자기 스스로를 깊이 사랑합니다.
그대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 속에 늪 하나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기뻐하며 목숨을 이어가는 지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잠자리, 나비 반딧불이들이 기뻐하고
얼마나 많은 생명의 환호성이 늪 근처에서 울려나오는지 아십니까.
지나가던 철새들이 내려와 날개를 쉬며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아십니까.
그대 거기 있다고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마세요.
그대는 좋은 점을 참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장점을 사랑하세요.
아직도 당신이 베풀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그대가 능력이 부족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그 일이 당신의 생애에 자부심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대 거기 있다고 자기 스스로를 하찮게 생각하지 마세요.
개울물은 거기 있음으로 해서 강물의 핏줄이 됩니다.
그대도 거기 있음으로 해서
바다같이 크고 웅장한 것의 실핏줄을 이루고 빈틈없는 그물코가 됩니다.
그대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해서,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표시가 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물코는 한 곳만 끊겨 나가도 그리로 모든 것이 빠져 달아납니다.
그대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크고 완전한 것이 존재하는 겁니다.
거대한 바닷물도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 이룬 것입니다.
여윈 개울물 한줄기야말로 강물의 근원이요 모태인 것입니다.
그대도 그처럼 근원이요 출발입니다.
그대 늘 거기서 시작하세요.
그대는 크고 거대한 것의 시작입니다.
그대 거기 있다고 힘겨워하지 마세요.
과꽃도 해바라기도 거기 그렇게 있지만
초라한 뜨락을 꽃밭으로 바꾸고 퇴락한 돌담을 정겨운 공간으로 바꿉니다.
그대가 거기 있는 것처럼 소박한 모습으로 서서
자기들이 있는 곳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이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꽃밭으로 바꾸는 것처럼 그대도 그렇게 꽃으로 있습니다.
그대 힘겨워하지 마세요.
그대의 모습이 다른 이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힘겨움을 이기지 않고 아름답게 거듭나는 것은 없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도 땡볕과 어둠과 비바람을 똑같이 견딥니다.
마을 어귀의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견디는 비와 바람을
채송화도 분꽃도 똑같이 겪으며 꽃을 피웁니다.
그대 거기 있다고 외로워하지 마세요.
살아 있는 것들 중에 외롭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들판의 미루나무는 늘 들판 한 가운데서 외롭고
산비탈의 백양나무는 산비탈에서 외롭습니다.
노루는 노루대로 제 동굴에서 외롭게
밤을 지새고 다람쥐는 다람쥐대로 외롭게 잠을 청합니다.
여럿이 어울려 흔들리는 풀들도 다 저 혼자씩은 외롭습니다.
제 목숨과 함께 쓸쓸합니다.
모두들 혼자 이 세상에 나와 혼자 먼길을 갑니다.
가장 힘들고 가장 어려울 때도 혼자
저 스스로를 다독이고 혼자 결정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외로운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외롭습니다.
지금 그대 곁에 있는 사람도 그대만큼 외롭습니다.
그대가 거기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도종환님 산문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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