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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그림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사오정버섯 2007. 2. 28. 22:29
대표적인 그림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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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년, 종이에 수묵, 79.2 cm × 138.2 cm, 국보216호, 호암미술관


<인왕제색도>는 겸재가 76세 때 그림입니다. 겸재의 대표작들은 대부분이시기에 그려졌는데 <금강전도>와 <계상정거도>도 76세 때 그린 그림이니 겸재의 실력이 절정에 올랐을 때 그린 그림이며 개인적으로 정선의 그림 중 제일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인왕(仁王)은 서울에 있는 인왕산을 말하는 것이고 제색(霽色)이란 큰 비가 온 뒤 맑게 갠 모습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비 개인 인왕산 그림인데 인왕산은 산 전체가 백색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바위산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백색화강암을 그리려면 흰색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온통 진한 묵으로 그렸습니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붓으로 저렇게 그리려면 붓을 옆으로 뉘어 빗자루를 쓸어내리듯 그려야 하는데 그것을 묵찰법(묵색 쇄찰법)이라고 합니다. 깎아지른 절벽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벽준과 비슷하지만 그려놓고 보면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그런 묵찰법을 한번이 아닌 몇 번을 반복하여 그렸기에 바위의 묵중한 중량감이 더욱 살아났습니다.


또 백색암석을 진한 묵으로 그려도 원래 색은 백색임을 느낄 수 있으니 만년의 겸재의 묵법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왕산을 직접 가까이에서 보면 백색바위가 백색으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바위가 비에 젖으면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솟구친 백색 화강암봉들의 독특한 색감은 이런 묵색 쇄찰법으로 쓸어내려야만 그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겸재는 인왕산 밑 인곡정사에서 살면서 수백 번, 수천 번의 연습과 실험에서 터득한 진경산수의 백미로 꼽힐만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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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봉우리>  이래서 그렇게 그렸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듭니다.


버드나무, 소나무 등 갖가지 나무의 표현도 기교와 세밀한 표현을 배재한 채 속도감 있게 그려내 거친듯하면서도 기품 있고 장대한 우리나라 수목의 특징을 살려 진경산수의 맛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양 옆과 특히 인왕산 정상의 윗부분을 의도적으로 과감하게 잘라 산의 웅장함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좁은 종이에서 벗어나 더 높게 뻗어나갈 수 있는 상상의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처음부터 의도된 건 아니었습니다.

원래 이 그림의 상단에는 순조때 영의정까지 지낸 만포 심환지(1730~1802)의 칠언절구 제시가 있었습니다. 겸재 그림을 좋아하여 그림을 소장하면서 제시를 적어두었는데 워낙 검소해어 그런지 죽어서 초상화 하나 마련하지 못하여 심환지 후손들이 초상화 대신 조상의 글씨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이 나서 그런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 이리저리 주인이 바뀔 때 제시는 없어졌고 그때 그림의 상단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다보면 감상자의 시선이 어느덧 자연스럽게 우측 앞에 있는 조그마한 집으로 모아집니다. 그림 감상에서 시선이 모아진다면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분명 화가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림의 주제이자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저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일까요? 그 의문을 풀어 가는데 단초를 마련한 분을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최완수 선생 이였는데 최완수 선생은 그림을 그린 때가 작품관지에서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신미년윤달 5월 하순' 에 그렸는데 정선의 60년 지기인 사천(槎川) 이 병연(李秉淵1671~1751)이 5월 29일에 죽었다 는걸 밝혀냈습니다.

 

그 후 오주석교수가 [승정원일기]에서 이 병연 사망 전후의 날씨를 확인했는데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줄 곳 비가 내렸고 25일 오후에 비로소 비가 완전히 개었다 는걸 밝혀냈습니다. 바로 <인왕제색도>는 이 병연이 죽기 4일전  25일 비가 개인 오후에 그렸다 는걸 증명한 것이고 기와집은 육상궁 뒷담 쪽에 있던 사천 이병연의 집(취록헌)임을 고증한 것입니다.


사천 이병연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요? 

정선이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거장 이였다면 사천은 일만 삼천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문장가이자 진경시인이었습니다.   겸재와 사천은 10대부터 스승인 김창흡 아래 동문수학한 벗이였습니다.

각각 81세, 84세까지 장수하면서 한동네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자란 형제 같은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애틋했던지 겸재가 양천(지금의 서울 가양동) 현령으로 부임할 때 이병연의 전별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그림날고 시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진 보이누나

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 왕망천(당나라 문인이자 서화가 왕유)


한양에서 멀지도 않는 코앞에 있는 양천으로 떠나는 것인데도 이렇게 애절한 시를 남긴다니.

또 전별시와 더불어 둘은 시와 그림을 주고받길 굳게 약속합니다.


겸재와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약속이 있어서

기약대로 가고옴을 시작한다.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봄에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둘러 대니

누가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신유 봄에 사천(槎川)


 이렇게 주고받은 시와 그림을 묶어 놓은 서화첩이 바로 그 유명한 [경교명승첩]입니다.

[경교명승첩]은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조선 최고의 서화첩입니다. 그곳에 서로 시와 그림을 주고받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한 점 있는데 바로 <시와상간도(詩畵相看圖)>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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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상간도> [경교명승첩]中  1740~41, 비단에 담채, 29 x 26.4 cm , 간송미술관 

사천과 겸재가 마주앉아 시와 그림을 주고 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

서로 바로보는 표정이 오랫동안 함께했던 지기끼리만 나눌 수 있는 표정입니다.


그렇게 겸재 자신의 피붙이와 다름없는 사천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겸재는 60여년을 형제처럼 지내온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 심정 이였을까요.

아마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며 하루빨리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나길 손꼽아 빌고 빌었을 것입니다.


바로 <인왕제색도>는 사천 이병연이 어두운 비구름이 개이듯 병이 나아 저 당당한 인왕산처럼 다시금 웅장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낸 그림입니다. 겸재가 사천의 집 주위를 수목들이 호위하듯이 빙 둘러 그려낸 것만 보아도 사천이 병을 이겨내고 당당한 소나무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겸재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속도감 있게 그린 수목이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수목을 그려 물크러져 보이는데 이것이 물기가 촉촉한 수목을 그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기법입니다.


이처럼 겸재가 지극한 마음을 담아 그렸기에 <인왕제색도>를 보면 산수화의 느낌을 넘어 절망 끝에서 피어나는 카타르시스의 분위기가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왕제색도>는 지금의 궁정동 칠궁 담장 너머에 있던 사천의 집(취록헌)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백악산 아래에 있는 사천댁 취록헌만 있으면 되었고 그 건너 인왕산 아래에 있는 겸재 집 인곡정사 사이에 많은 집들은 큰 의미가 없기에 안개 밑으로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앞 등성이에 육상궁 뒷담을 표현해 이쪽이 북악산록이란 것만 표시만 보더라도 궁정동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무지가 만들어낸 코미디 하나를 소개하자면 지금의 정독도서관에 가보면 <인왕제색도비>가 있는데 도서관에서 세운 비에 이곳에서 <인왕제색도>의 모습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아무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이곳에서는 인왕산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피 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근거도 없이 도서관에 기념비를 세워 놓은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에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겸재는 평생 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기량을 이 그림에 다 쏟아 부었던 것 같습니다.  묵색쇄찰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사천 이 병연을 상징하듯 바위를 중량감 넘치게 그렸고 그러자니 토산과 먼 곳의 수목은 단조로운 피마준과 미점만으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양성곽의 모습까지 세심하고 정성들여 그려 전체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한 점 흠잡을 데가 없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사천과 겸재가 마주앉아 시와 그림을 주고 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 서로 바로보는 표정이 오랫동안 함께했던 지기끼리만 나눌 수 있는 표정입니다.

    겸재가 이 인왕제색도를 그릴 당시, 자신의 피붙이와 다름없는 사천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겸재는 60여년을 형제처럼 지내온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 심정 이였을까요.

    인왕제색도는 사천 이병연이 어두운 비구름이 개이듯 병이 나아 저 당당한 인왕산처럼 다시금 웅장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낸 그림입니다. 겸재가 사천의 집 주위를 수목들이 호위하듯이 빙 둘러 그려낸 것만 보아도 사천이 병을 이겨내고 당당한 소나무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겸재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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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던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21점을 합친 화첩이 영구임대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사진은 수록작품 중 초당춘수(艸堂春睡)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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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룔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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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작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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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사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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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전도

금강전도(金剛全圖)

 국보 제217호. 지본담채. 59×130.7 cm. 호암미술관 소장. 금강내산을 부감형식의 원형구도로 그린 진경산수이다. 왼편에는 윤택한 토산들을 배치하고, 오른편에는 수직준으로 정의된 수많은 첨봉(尖峰)의 바위산을 그려넣었다. 바위산에 보이는 수직준들은 대개 강하고 활달하며 예리한 데 비해, 토산에 보이는 준법과 미점들은 습윤하고 부드럽다. 부감법으로 홍문교로부터 1만 2천 봉을 집결시켜서 그리는 화법은 겸재 이후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것이 겸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본(祖本)이 있었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상고할 길이 없다. 《금강전도》에 나타난 필법은 거센 필선으로 중첩한 무수한 봉골(峯骨)을 죽죽 그려내린 것으로, 금강산과 같은 골산(骨山)에 알맞다. 이 점에서도 겸재의 천재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골법을 써서 중봉을 그리거나 산세를 묘사할 때는, 화면 전면을 꽉 채우거나 중앙으로 몰아 집중적으로 그리는 두 가지의 독특한 구도를 채택한다. 이 점은 중묵암산(重墨岩山)의 화법 때의 구도와는 아주 다른 것으로 지도제작법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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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정양사도

금강산정양사도(金剛山正陽寺圖)


 지본(紙本) 설채(設彩)한 부채의 그림이다. 22×61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경산수를 그린 겸재는 특히 금강산의 뾰족뾰족한 산골(山骨)을 독특한 화법으로 잘 그렸다. 왼쪽과 아래 부분에는 토산(土山)이 자리잡고 중앙에 정양사를 중심으로 뒤와 오른쪽으로는 금강산 1만 2000봉이 빽빽이 들어서서, 그 전모를 한 공간에다 모아놓은 것이다. 이 외에도 금강산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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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상정거도

도산서원이 놓여진 자리는 명당이다. 그곳은 강과 산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 강과 산은 본시 그들이 가진 기운이 같지 않다. 대표적인 것 하나씩만 들자면 강(물)은 끝없이 밀어 무너뜨리고, 쳐서 뚫으려 하는 것이요, 산(땅)은 단단해 끄덕도 하지 않으며, 자신의 몸뚱이를 지켜내려 하는 것이다. 퇴계가 선택한 자리는 이 두 개의 기운(氣韻)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기운들은 서로 비슷한 힘으로 맞물려 서로 힘차게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생기(生氣)가 가득한 자리이다.
그림 안에 보이는 뒤 쪽의 다른 두 집은 도산서원과는 대조적이다. 그 자리에는 이런 생기는 없다. 거기에는 강과 산의 밋밋한 경계만 있다. 두 기운이 활발하게 주고받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 대하고만 있다. 서로 뻣뻣하게 대립하고 있다. 도산서원이 놓여진 자리 역시 앞에 놓인 커다란 바위산과 안으로 흐르는 조그만 샛강을 빼면 사정은 같아진다. 더 이상 살아 꿈틀거리는 자리, 즉 명당(明堂)이라 말할 수도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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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가(讀書餘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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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1730) ]

한때 조선을 시끄럽게 했던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자 정선은 안도의 기쁨으로 이 그림을 그려내었습니다. 이는 조선이 시련을 겪고 더욱 단단한 기반을 쌓게 되리라는 믿음과 기대로 그린 것이죠. 소나무는 원래 조선왕조를 상징한다고 해요. 그림 속 소나무는 그 수명이 매우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새싹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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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도(狎鷗亭圖) (1741) ]

정선은 한양 이곳 저곳 아름다운 곳들을 돌아보며 <한양 부근의 빼어난 장소를 그린 화첩>을 그려내었습니다. 동작진, 남산, 세검정 그리고 압구정도 등을 담아 내었는 데요. 금강산이나 경상도 등의 이름난 명승지 뿐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모습도 그림으로 정감있게 그려내었으니, 그의 조선 땅에 대한 사랑은 남달라 보입니다. 그림 속 압구정은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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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대(金剛臺) (1755) ]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하늘 아래 처소 같기도 하고, 신선계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금강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엷은 청색으로 표현한 것이 더욱 신비스롭구요. 80세가 된 정선은 더 이상 대상을 충실하게 그리기 보다는 작가의 감상을 더욱 중시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소 추상적인 그림이 된 듯 하네요. 아마도 자신이 쉬고 싶은 이상향으로 그려낸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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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문암(通川門巖圖) (1751) ]

정선은 관동지방을 여행할 때에 이 통천문암을 많이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전해오는 것 중에서 가장 노숙한 솜씨로 그린 것입니다. 거의 윤곽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바위의 기운을 은근하고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렁이는 파도가 곧 덮칠 것처럼 일고, 물결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데, 거대한 바위산 사이를 단촐한 선비의 행차가 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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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석정(叢石亭) (1747) ]

해금강의 총석정을 그린 것으로 그가 여러 번 그렸던 금강산 기행 화첩에 수록된 그림 중 하나입니다. 기이하게 솟은 바위와 벼랑 끝에서 동해의 일출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운 정자 등 실제 총석정의 모습을 신비롭기까지 하네요. 바위는 특유의 죽죽 내려 긋는 수직준법으로 그려 더욱 강한 느낌이 듭니다. 또한 바위 아래로 포말을 형성하고 있는 파도 또한 이채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