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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千鏡子)화백 미공개작품 서울전

사오정버섯 2007. 2. 27. 21:14
천경자(千鏡子)화백 미공개작품 서울전

 
    [2006. 3. 8. ~ 4. 2.]
    천경자 화백은 그림을 안 팔기로 유명합니다. 팔순 연세로 병원과 집을
    오락가락 하고 계시면서 90여점의 그림과 판권을 서울시에 기증하였습니다.
     님의 쾌유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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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자(千鏡子, Chun Kyung-Ja 1924 - )
    전남 고흥 출신의 천경자 화백은 전남여고를 거쳐
    1944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광주여고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로 수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1965년 5월 문예상, 1971년 서울시 문화상, 1975년 3.1문화상,
    1979 예술원상, 1983 은관문화훈장, 태통령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화력(畵歷) 50년이 넘어선 천경자 화백의 작품으로는
    <정>, <생태>, <꽃무리>, <누가 울어>, <물굿>, <노을이 타는 소리> 등 약 1천여점에 이른다.

    저서로는 『여인소묘 』, 『우성이 가는 곳 』, 『한』, 『캔맥주 한잔의 유희』,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천경자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영혼 울리는 바람을 위하여』,
    『언덕위 양옥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위하여』,
    『천경자화집 』등이 있다.

    천경자 화백은 배정례, 故박래향, 故이현옥과 함께
    한국4대 여류화가로 꼽히는 화단의 원로이다.



    ▒ 生만큼 강렬한‘이국 畵風’

    내달 서울展… 작품마다 극한체험 생생
    남태평양·아프리카 등 돌며 그림 기행
    고통·시련 이기려 뱀그려…글도 많이 써


    올해 82세의 천경자 씨는 10년 전만 해도 타히티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을 만큼 전세계를 누볐고 문인 못지않게 많은 글을 써온 화가다.
    그러나 그의 캐릭터는 인생 전반의 예술혼(魂) 보다는 ‘정한(情恨)’과 ‘환상’ 등의 감성만 지나치게 부각된 감이 없지 않다.
    그가 평생 추구해온 화제가 뱀, 꽃과 여인, 야생의 자연과 이국 풍물인데다 꿈과 환상의 세계를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한 때문이지만 폭넓은 활동반경과 치열한 작가정신은 과소평가된 측면이 없지 않다.

    1969년 남태평양에서 시작한 스케치 기행은 인도와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이어졌으며, 다시 아프리카 대륙과 중남미 국가, 영국과 미국으로 반경을 넓혀갔다.
    천 씨는 46세에서 74세까지 28년 동안 총 12회 기행에 나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에 10차례나 화문(畵文) 시리즈를 연재했으며 스케치전 3회와 기행문집 2권으로 결실을 맺었다.

    ▒ 뉴욕 병상에서도 “붓은 내 운명”

    천경자씨는 1998년 9월 초 맏딸 이혜선 씨가 사는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 해 11월 일시 귀국해 피붙이처럼 아끼던 대표작과 스케치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돌아간 후 외부와 단절한 채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2003년 봄에 뇌출혈로 병상에 눕기 전까지는 거의 붓을 놓지 않으셨어요.”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탈진한데다 몸무게가 급격히 줄어 미국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는 혜선씨는 “작품 기증 후 한동안은 몹시 허탈해 하셨으나 차츰 안정이 되자 외출도 하고 스케치도 하셨다”고 근황을 전했다.

    초기에는 그라나다나 도미니카로 스케치 여행도 다녀오고 허드슨 강변에 나가 산책도 했으나 기력이 쇠해진 후에는 주로 집에서 미완성 작품에 채색을 하거나 정물을 그렸다고 한다.

    “마늘이나 고추, 토마토, 가지 등의 채소를 색연필이나 크레용으로 작은 종이에 그리셨는데 아주 예쁜 것들도 꽤 있었어요. 하지만 정신을 놓지 않으려는 소일거리여서 보관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때 사태가 심각해 자식(2남2녀)들이 다 모이기까지 했으나 병세가 호전됐다”고 전하는 혜선 씨는 “치료 때문에 말하기는 힘들지만 가족들을 알아보고 표정이나 손짓으로 반응을 보일 만큼 정신은 맑은 편”이라고 했다.

    “어머니 전시회 일로 서울 간다고 말씀 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시며 손까지 흔들어 주셨어요.”

    연세가 많은데다 거동이 힘든 상태지만 작품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고 가끔은 옛 추억도 떠올린다는 게 그를 지켜온 혜선 씨의 말이다.

    “뉴욕에 온 후로 외부와의 관계를 일체 끊다 보니 서울에서 어머니를 둘러싼 이런저런 일들이 끊임없이 생기는 거예요. 어머니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큰 잔치를 열어드리는 겁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참석하지 못하는 만큼 가족들은 일체 전시장에 나서지 않을 뜻을 밝혔다.

    [조선일보 2006.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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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화밭에서
    1950년대에 그린 채색화로 목화밭에 아이아빠가 드러누워 있고
    천씨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평화로운 나들이 모습.
    환도 후 규모가 커진 대한미협전에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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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아프리카 기행의 인상들과 작가의 고독과 꿈을 조롸시킨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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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례 언니’1973년작. 독창적 화풍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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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상/1982 http://www.kcaf.or.kr/art500/chunkyungja/y70/images/g7025.jpg>

    아열대 Ⅰ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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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만다의 그늘 / 1985 / 94 x 130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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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의 비 / 1982 / 34 x 46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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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의 통곡 / 1995 / 94.5 x 128.5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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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소녀 / 1985 / 60 x 44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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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파는 그라나다 여인 / 1993 / 45.5 x 38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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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黃昏) / 1994 / 40 x 30.5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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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의 티나 / 1994 / 37.5 x 45.5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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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과 나비 / 1973 / 39 x 59.5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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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간 / 1986 / 40 x 31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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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티모어에서 온 여인 1 / 1993 / 38 x 46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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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캬바레(뉴욕) / 1990 / 24 x 27.5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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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와 바나나 / 1993 / 40.8 x 31.5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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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서커스단 1 / 1995 / 31.4 x 40.5 / 종이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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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四月(사월) / 1974 / 40 x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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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 올드 델리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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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孤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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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센트럴 파크 (1981) ]